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그리고 호로비츠 | ||||||||||||
[이광열의 음악과 나 - 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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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 접속하면, 블라디미르 호로비츠가 나이 75세 때인 1978년에 주빈 메타의 지휘로 뉴욕 필과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 Op.30>을 협연한 동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소문대로 그는 매우 특이한 자세로 연주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는 바른 자세로 앉아 몸도 거의 움직이지 않고, 손가락을 모두 쭉 편 채 손바닥이 건반에 닿을 정도로 해서 건반을 두드리고, 피아노 페달도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때로 건반 하나하나를 손가락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으면, 일흔다섯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피아노 협주곡 가운데 세계 3대 난곡 중의 하나인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이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샤인>이란 영화를 통해서였습니다. <샤인>은 호주 출신의 피아니스트인 데이비드 헬프갓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인데, 1947년생인 헬프갓은 열 살 때 이미 피아노 신동으로 알려졌고, 당시 세계적인 연주자들로부터 해외 유학을 권유받았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습니다.
아들의 뛰어난 피아노 실력에 강한 자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외국 유학을 권유하는 음악가들의 말을 듣지 않고 곁에만 두려고 했던 폴란드계 유대인인 아버지. 나치 치하에서 부모, 형제를 모두 잃었던 과거를 가지고 있었던 아버지였기에, 아들과 떨어지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아들의 유학을 그토록 반대하도록 만들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의 반대를 뿌리치고, 장학금을 받아 영국 왕립음악원으로 유학을 강행했던 헬프갓. 영화 속의 팍스 교수는 헬프갓에게서 피아니스트로서의 천부적인 재능을 발견하고는, 사랑을 가지고 헬프갓을 가르치고 돌봅니다.
헬프갓을 가르쳤던 스승 시릴 스미스는 “낭만적인 거장 리스트와 라흐마니노프와 같은 작품들을 연주할 때의 그의 재능은 거의 천재의 경지에 올라 있으며, 개성적인 면에서나 테크닉적인 면에서나 호로비츠와 같은 수준”이라고 헬프갓의 연주를 평했습니다.
헬프갓은 졸업연주회에서 자신이 선택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합니다. 하지만 모든 에너지를 연주에 쏟아 부었던 탓이었는지, 헬프갓은 연주가 끝나자마자 정신분열 증세를 일으키며 쓰러집니다.
이후 10년 동안 정신병원에서 격리치료를 받으면서 인고의 세월을 보내다가 퇴원을 했지만, 퇴원 후에도 정상적인 생활은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정신병원에서 알고 지내던 질리언이, 퇴원한 그를 찾았다가 그가 열정적으로 피아노를 치는 것을 본 후, 피아니스트로서의 그의 재기 가능성을 발견하고는 그의 청혼을 받아들여 아내가 됩니다.
1984년 나이 37세가 되었을 때 헬프갓은 재기 연주회를 열었고, 이후 전세계를 다니며 연주했습니다. 이러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가 <샤인>이었고, 영화 속의 피아노곡은 헬프갓이 직접 연주했습니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비롯해서, <전주곡 op.3 no.2>,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와 <헝가리안 랩소디 2번>, 그리고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꿀벌의 비행> 등.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은 기교나 감성 면에서 매우 어려운 곡이었기에, 뛰어난 피아니스트라도 제대로 연주하기가 어려워, 비평가들 사이에 ‘작곡가이면서 탁월한 피아니스트인 라흐마니노프만이 연주할 수 있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라흐마니노프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유난히 큰 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지만, 그의 곡은 ‘미치지 않고서는 연주할 수 없는 곡’이었을지 모릅니다(영화 <샤인>에서 헬프갓이 졸업연주회 때 이 곡을 연주하겠다고 하자, 팍스 교수가 놀라면서 했던 말처럼).
하지만 그러한 라흐마니노프도 1928년 당시 미국으로 갓 망명한 스물다섯 살의 호로비츠가 연주하는 것을 지켜보고 난 후, 호로비츠의 조언에 따라 이 곡을 일부 수정하여 연주하게끔 했을 정도로, 호로비츠의 연주 실력을 인정하고 신뢰했습니다. 피아노 작곡과 연주 분야에 있어서, 19세기에 리스트가 있었다고 한다면, 20세기에는 호로비츠가 있었다고 할 정도로, 호로비츠는 피아노로 인간의 모든 감성을 표현하곤 했습니다.
호로비츠는 1928년에 뉴욕 카네기 홀에서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으로 데뷔하면서 라흐마니노프를 만났고, 이어 그 어렵다고 여겨지던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협연했습니다. 그는 1933년에 토스카니니를 만나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전곡을 협연했을 정도로, 토스카니니의 두터운 신뢰를 받았습니다.
1940년대는 바이올린의 하이페츠와 더불어, 피아노로는 호로비츠가 음악계를 주도하던 시대였습니다. 두 사람으로 인해 연주자의 길을 포기해야 했던 사람들이 부지기수라고 했을 정도로, 그들은 자기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였습니다.
호로비츠는 수많은 연주와 녹음으로 바쁜 일정을 보내다가, 1953년부터 1965년까지는 연주회를 일체 열지 않는 등 공백기를 보냈으며, 1965년에 두 번째 재기 리사이틀을 카네기 홀에서 열었는데, 당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아우르는 연주 솜씨를 보여주었습니다. 다시 세 번째 공백기를 거친 후, 호로비츠는 보다 공격적인 성향의 연주를 보여주는 등 또 다시 변모되고 성숙된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곤 했습니다.
1930년 이후 이 곡만 여섯 번에 걸쳐 녹음했다는 호로비츠. 그래서 그의 연주는 들을 때마다 새롭게 들리는 것일지 모릅니다. 마치 사람들이 그 전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산을 찾을 때마다 그 능선과 계곡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게 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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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June 23, 2014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그리고 호로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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