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January 14, 2014

영화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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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다

영화 여행 2010/09/11 07:18 꺄르르
영화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은 대단한 작품입니다. 놀라운 영화란 얘기는 미리 듣던 터였는데 과연 입소문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느낄 수 있네요. 영화에 대해 인상비평을 하기보단 영화에 담긴 주제의식과 장치들에 대해 가름하고자 쓴 글입니다. 따라서 아래에는 영화 내용이 잔뜩 나옵니다.

왜 여자주인공 이름이 뜬금없이 복남이일까?

이름 김복남(서영희)부터 뭔가 찝찝합니다. 여자 이름이 김복남이라니! 물론 굳어진 성관념을 넘어서 여자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남자이름을 쓸 수 있습니다. 성별에 따라 이름이 딱 정해진 건 아니니까요. 요즘엔 어여쁜 남자이름도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나 김복남이란 이름은 성에 얽매지 않는 자유로움을 뜻하기보단 예전 주말연속극 <아들과 딸>의 후남이란 이름과 마찬가지로 여성이 남자란 사슬에 갇혀있단 걸 드러냅니다.

태어나자마자 자신이 바라지 않아도 평생 짊어져야 하는 김복남이란 이름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업신여기겠다는 이 세상의 주홍글씨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인두질 당하듯 김복남이란 이름은 복남이라 불리는 여성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지요. 여자가 복있는 남자(복남)라 불리는데, 복되게 산다면 그게 더 야릇하겠지요.

복남이란 이름처럼 복남이의 삶은 펀펀하지 않습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뭍에 가본 적 없는 섬여자 복남이는 온갖 등쌀과 닦달, 성폭행과 발길질에 시달립니다. 어쩜 저럴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안타까운 장면들이 이어지지만, 저런 모습은 영화라서 저렇게 찍은 게 아닙니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미처 몰랐더라도 옆집에서 벌어지는 일이기 십상입니다. 복남이의 고통은 한 여자의 수난이라기보다 여자라서 겪는 고난을 보여주니까요.
아빠란 남자에게 예쁨을 받고자 하는 딸 '연희'는 '여자'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 계보을 드러낸다


때리는 남자들보다 어정쩡하게 말리는 여자들이 더 밉다

이 영화는 단순히 남자들이 여자들을 이렇게 괴롭힌다는 걸 이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성차별을 오싹하게 그려내죠. 복남이의 남편이나 시동생보다 관객들로 하여금 울컥하게 하는 사람들은 동호할매, 파주할매, 순이할매, 개똥할매들, 그리고 서울 친구 해원(지성원)입니다. 이들은 권력에 대들지 못한 채 애오라지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만 입방정 떠는, 일상에서 어렵지 않게 만나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꼬락서니죠.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어처구니없는 옛말을 잠깐 들여다보면, 왜 이런 말이 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할매들은 복남이가 쥐어터지고 쓰러진 채 헉헉대는 꼴을 보면서 조금 안쓰러워하지만, 그렇다고 복남이의 편에 서지 않습니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운 까닭은 이런 일이 빚어지는 얼개엔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기 때문이죠. 이 땅의 쌔고 쌘 시누이들은 올케가 자기 엄마에게 숱하게 머리털이 뽑히고 나서야 말리는 체 하지만 툭하면 뺨을 맞아야 하는 틀거리에 대해 꼬투리 잡진 않았습니다. 다만 너무 호되게 조지지 말라고만 할 뿐.

이런 시누이들처럼 이 할매들은 가부장제에 길들여진 여자들의 모습을 고스란히 알려줍니다. 여자들이 일을 도맡아 하는데도 ‘남자가 있어야 된다’는 얘기를 입버릇처럼 뇌까리고, 여자이면서도 여성을 낮잡으며 못 미더워하고 남자에게 기대려는 모습은 가부장제가 얼마나 여자들을 노예화하였는지 딱 까놓고 보여줍니다. 이런 여자들을 지켜보기란 메스꺼우면서도 스잔하지요.

그 무엇이 여자들로 하여금 남자들에게 굽실거리며 주눅 들게 만드는가?

그런데 가부장제에 왜 여자들이 굽실거리는지 이 영화는 놀랍게도 건드립니다. 일상에서 차별을 받으며 오랜 세월 종살이하였던 생활문화가 여자들을 주눅 들게 하고 미욱하게 만들었지만, 이것만으론 모자랍니다. 여자란 남자를 섬기고 떠받들어야 한다는 말뚝을 박는 게 있으니, 바로 남성 입맛대로 이뤄지는 성관계입니다.

아내가 집안에 있는데도 다방여자를 불러다 안방에서 성관계를 맺는 모습은 좀 심하다 싶지만, ‘성관계의 진실’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성싶습니다. 성이란 보수성을 지닌 영역에선 남자는 ‘성욕의 주체’이지만 여자는 ‘남자들의 대상’으로 남아있으니까요. 성관계의 가지런함은 아직 만들어내지 못 했습니다. 여자들이 일부일처제란 허울을 믿고 결혼을 하지만, 남자들은 사부자기 안방에서 야동을 보고 바깥에서 걸핏하면 성매매를 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더 소스라치는 건 이런 뒤틀린 성관계가 여자들로 하여금 울컥하게 하기보다 도리어 남자들 앞에서 고분고분 해지도록 만든다는 점입니다. 왜 자기 남편들을 다 죽게끔 한 치매할배가 곧 할매들에게 치켜세움 받았을까요? 할매들이 앞 다투어 치매할배의 ‘남근’에 끄달렸기 때문입니다. 일을 하지 않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맹꽁이잎’만 먹는데도 치매할배가 어엿하게 살 수 있는 까닭이죠. 진짜 여성해방을 이루려면 ‘남근’에서 벗어나는 한다는 말처럼 들리게 됩니다. 


더러운 리코더를 닦지도 않고 입에 문 복남이, 리코더에 맞아 쓰러지다

따라서 리코더는 아주 상징성 강한 장치로 쓰입니다. 리코더의 생김새를 굳이 남근과 견줄 까닭이야 없지만, 이 영화에선 남근의 대리물로서 작동하죠. 어린 복남이가 남이 물던 리코더를 닦지도 않고 입에 무는 장면도 복남이의 앞날을 가늠하게 하고, 남자애들이 리코더로 복남이를 때린 뒤 복남의 몸을 들추는 것도 이런 맥락입니다.

자신을 짓밟고 욕보이는, 더럽고 아니꼬운 남성질서에 구멍을 내고자 복남이는 낫을 들고 이리저리 휘두릅니다. 그러나 낫만으론 남성질서가 무너지지 않자 영화 막바지에 다른 곳도 아닌 남근을 겨냥해서 쇠망치를 내리칩니다. ‘남근’이란 남성권위에 치이고 족대김 당한 복남이는 어디를 부셔야 하는지 잘 알고 있던 것이죠.

하지만 한 여자가 대든다고 길고긴 세월 이뤄져온 남성지배가 휘우듬하지 않습니다. 남근질서는 아주 굳세고 검질기죠. 그리하여 복남이는 총에 맞아 죽지 않고 리코더에 ‘꽂혀’ 죽습니다. 그것도 자신을 건져주리라 믿었던 서울 친구에게 말이죠. 포스터에서 복남이와 해원이의 모습은 많은 걸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도 피 흘리며 남성사회를 욕망하는 수많은 여자들의 괴로움과 서글픔을.

세상의 악마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친절한 복남씨>의 탄생!

영화 <악마를 보았다>가 복수의 올바름을 물었다면,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은 한 발 더 나아갑니다. 세상의 악마들에게 침만 뱉지 말고, 그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고 있냐며 묻습니다. 서울 친구가 잘 보여주듯 옆 사람을 악마로 만들고 세상살이를 섬뜩한 지옥으로 만드는 것은 사람들의 고개돌림입니다. 무관심을 머금고 사회는 갈수록 끔찍해집니다.

해원이가 복남이의 편지를 진작 뜯어보았다면, 조금 더 용기를 갖고 사회사달에 입을 열었다면 어땠을까요? 복남이의 고통은 보다 줄어들었을 테고, 해원이도 그렇게 쉽게 정리해고 당하지 않았겠죠. 사회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곳이란 생각의 끈을 놓아버리면, 불쌍한 할머니를 매몰차게 내쫓고 후배 귀쌈을 아무렇지 않게 올려붙이는 괴물이 되기 십상입니다.

김기덕 영화와 박찬욱 영화가 불편함을 안겨주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을 극장으로 불러 모으는 까닭은 끈덕진 폭력과 성이란 매체, 그 안에서 빚어지는 사람살이의 고약함을 잘 그려내기 때문이지요. 이 영화는 ‘김기덕 세계관’에다 <친절한 금자씨>가 버무려진 느낌입니다. 그야말로 <친절한 복남씨>의 탄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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