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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November 28, 2014

<영화 & 클래식> 바흐 이전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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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클래식> 바흐 이전의 침묵  음악이 주는 충만 
2013/01/28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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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가 없었다면 신은 권위를 잃었을 것이다. 바흐가 있기게 세계는 실패작이 아닐 수 있었다. 바흐 이전에도 세계는 존재했다. 그러나 아무 울림없는 텅빈 공간이었을 뿐이다." - 시오랑

 

영화는 정적이 흐르는 하얀 벽으로 시작해서 연주자 없이 스스로 움직이는 피아노가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아리아를 치고 있는 장면을 한참 보여준다. 이 첫장면은 영화 제목과 바흐의 음악사적 의미를 상징한다. 하얀 벽과 정적은 바흐 이전의 세상이며, 바흐 음악을 통해 비로서 그 침묵이 깨진다. 이는 영화 중간에 나오는 악기상과 서점 주인의 대화에 나오는 시오랑의 말과 연결된다.
 
 


영화는 현대와 바로크 시대, 멘델스존 시대를 오가며 다양한 장면이 등장한다. 라이프치히에서의 바흐, 성토마스 교회의 안내원, 하모니카로 바흐를 연주하는 트럭기사, 의식 전 몸을 씻듯 샤워후 바흐를 연주하는 첼리스트, 폭우 속에서의 바순으로 연주되는 바흐, 지하철에서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악기점에서 수십대의 피아노 연주, 합창단의 합창 장면 등등...  짧은 에피소드간에 연관성이나 극적인 스토리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바흐의 음악만이 공통성을 부여한다. 어떤 극적인 스토리도 바흐의 음악을 능가할 수 없으며, 오직 음악만으로 바흐를 표현하려는 감독의 의도가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바로크 시대의 오르간이나 하프시코드(피아노의 전신)로 연주되는 바흐를 감상할 수 있는 기쁨을 준다. 

영화에서 가장 극적인 부분은 멘델스존의 하인이 시장 푸줏간에서 싸온 고기를 싼 포장지에서 바흐의 마태수난곡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마태수난곡은 예수님의 마지막 수난기를 표현한 곡이다. 시장에서의 발견은 예수님과 세상이 바흐를 통해 연결됨을 상징한다. 또한 포장지의 붉은 피는 주의 보혈을 의미한다. 


드레스덴 지하철에서 수십명이 바흐의 무반주첼로 모음곡을 연주하는 장면도 인상 깊다. 드레스덴은 2차 대전 당시 폭격으로 도시 대부분이 폐허가 된다. 지하는 죽은 자의 공간이다. 레퀴엠으로 사용된 듯하며, 첼로의 깊은 맛으로 당시 죽은 자들에 대한 원혼을 위로한다.


고서점에서 두 노인이 '다른 세계의 음악'이란 책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른 세계는 아우슈비츠이다. 이 책은 홀로코스트 당시 음악이 많은 사람들에게 절망을 주었음을 말한다. 다음 장면에서 피아노가 바다에 빠진다. '피아니스트'라는 영화에서는 홀로코스트 상황에서 쇼팽의 발라드를 통해 주인공이 삶을 얻는다. 음악은 구원이 되기도, 절망이 되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는 오직 바흐의 음악만이 등장한다. 수많은 에피소드들은 바흐를 보여주기 위한 소도구들이다. 또한 우리의 일상 속에서 음악과 바흐의 의미를 보여주고자 한다.

<영화에 나오는 바흐 명곡>
골드베르크 변주곡
영화에서 라이프치히 관광 유람선에서 큰 성을 지나면서 이 곡의 탄생 배경을 설명한다. 카이저 링크 백작은 불면증에 시달리는데 바흐 제자인 골드베르크가 백작의 편안한 밤을 위해 바흐에게 의뢰해 만들어진 곡이라는 것이다. 2분 남짓한 총 30개의 피아노 곡이다. 처음 피아노 혼자 연주하는 곡이 1번 아리아, 바흐가 카피스트 앞에서 빠르게연주하는 곡이 23번, 악기점에서 수십대의 피아노가 함께 연주하는 곡 경쾌하고 서정적인 7번, 말이 빠른 선율에 맞춰 움직이는 스텝이 음악과 절묘하게 일치하는 곡이 28번이다. 이 곡은 글렌굴드의 연주가 최고로 꼽힌다. 실제 들어보면 수면용 음악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빠른 템포가 많다. 계속 듣다보면 지루해서 졸린다.^^ 다음은 글렌굴드의 연주이다. 무의미해보이는 선율의 반복은 우리의 일상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첼로 무반주 모음곡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클래식으로 선정된 바 있다. 앞서 소개한 포스팅인 '뮤직 오브 하트', '더 콘스트'에도 등장하며, 수많은 드라마에도 나온다. 13세의 카잘스에 의해 스페인 고서점에서 200년 만에 발견되어 12년 간의 노력 후에 세상에 처음 선을 보인다. 그 후 카잘스에 의해 녹음된 음반은 많은 평론가들 사이에서 20세기 최고의 명반으로 손꼽힌다. 모노 SP 음반을 LP로 복각한 음반으로 최근 음반에 비해 깔끔하지는 않으나 평생 이 곡에 전념한 카잘스의 혼이 느껴지는 불후의 명곡이다.


평균율 클라비아 곡집
바흐가 남긴 최대의 음악 유산으로 흔히 '인류 음악이 모두 소멸되어도 이 곡만 있으면 다시 살려낼 수 있다.'는 말로 이 작품의 위대함을 표현한다. 건반 음악의 구약 성서라고도 평해지며' 교육용으로 화성학과 대위법의 교본으로 쓰인다. 24곡의 프렐류드(전주곡 : 소개를 위한 자유로운 즉흥 양식의 짧은 곡)로 구성되어 있으며, 영화에서 바흐는 아들에게 1번을 가르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가 거짓이 없을 때 음악도 거짓이 없고 충만해진다."라고 이야기한다.



환상곡과 푸가 g 단조
영화의 끝머리에 또다시 자동 피아노가 등장한다. 이번에 연주하는 곡은 [환상곡과 푸가] g단조인데, 화면은 빠른 속도로 돌아가는 자동 피아노 악보를 자세하게 보여준다. 흰 종이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악보의 모양은 놀랍게도 바흐 음악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일정한 패턴으로 흘러가는 음악처럼 종이 위에 뚫려 있는 구멍들 역시 일정한 패턴의 무늬를 이룬다. 일정한 패턴의 반복, 같은 음형으로 상승했다가 하강하는 소리의 굴곡을 종이 위의 구멍들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네이버 지식 백과에서 진희숙의 글을 인용

<영화 & 클래식> - 클래식을 소재로 한 영화

source: http://blog.naver.com/PostThumbnailList.nhn?blogId=lsi16&from=postList&categoryNo=11

<영화 & 클래식> 글렌굴드에 관한 32개의 이야기 (4)
<영화 & 클래식> 바흐 이전의 침묵 (4)
<영화 & 클래식> 클라라 - 슈만의 사랑, 브람스의 고독함 (11)
<영화 & 클래식>뮤직 오브 하트 - 바흐의 두대의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13)
<영화 & 클래식> 레드바이올린 (12)
<영화 & 클래식> 바이올린 플레이어 - 바흐의 샤콘느(BWV1004) (5)
<영화 & 클래식> 더 콘서트 - 챠이코프스키 바이올린협주곡 (12)
<영화 & 클래식> 샤인 -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 (3)
<영화& 클래식> 설국열차 - 바흐의 골드베르크변주곡 (10)

Friday, January 17, 2014

장화 홍련 전

아래글 출처 : http://ask.nate.com/knote/view.html?num=148540

장화홍련 (2003)
| 07.07.05 10:21

오늘은 영화 장화홍련에 대해 몇가지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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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홍련은 김지운 감독의 2003년작 영화입니다. 지금까지 소개해드렸던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영화입니다. 그럼 영화속의 몇가지 궁금한 점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1. 수미(임수정)이 집에들어가서 시계를 열고 시간을 돌리는장면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DVD에 수록되있는 김지운 감독의 코멘트리에서 인용하자면 "죽어있는 시계를 통해서 죽음의 그림자를 이야기 하고 싶었다", "무언가를 되돌리고 싶어하는 수미의 강박관념", "돌아가고 싶어하는 수미의 마음" 등을 나타 냈다라고 감독님은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엄마와 수연이 살아있던 새엄마가 오기전의 행복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을 무의식적으로 표현한 것이겠죠.


2. 처음 집에 온날 왜 옷장에 똑같은 옷이 걸려있는 것인가?

코멘트리 내용을 발췌해 보자면 "수미(임수정)가 다중인격 망상 증세를 갖고 있음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똑같은 옷,똑같은 책,똑같은 노트….쉽게 지워지지 않는 기억에 대한 정신적 압박감이며 누군가에게 특정 혐의를 전이시키고 싶은 분열된 인격을 상징한다." 요컨대 엄마의 자살과 수연의 죽음에 자신또한 같고 있는 책임을 전가하고 싶고 잊고 싶어하는 마음의 상징인것이죠
3. 수미의 꿈은 도대체 뭘 뜻하는 건가?

꿈속에서 나타난 귀신은 수미의 엄마로 추측됩니다. 이유는 동생의 죽음은 인식을 못하고 옆에 있다고 생각하는 상황이지만 엄마의 죽음은 이미 알고있기 때문입니다. 역시 엄마의 죽음에 대한 자책감 때문에 그런 꿈을 꾼것 같습니다. 김지운 감독님의 말로는 특별한 뜻은 없고 극의 공포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그런 장면을 넣었다고 합니다.


4. 처음 선착장에서 수연이의 손을 보고 수미가 놀라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건 명확이 밝혀진게 없습니다. 수연이의 부재를 암시하는것 같기도 하고 수연이 죽었던 당시에 피투성이가 된 수연의 손에 대한 수미의 무의식의 기억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5. 도대체 그집에 실제로 존재하는것은 무엇들인가?

정확하진 않지만 수연이의 원귀, 수미, 아빠 이렇게 셋으로 보입니다. 수연이 원귀를 직접적으로 느낀사람은 삼촌인 선규의 아내입니다. 극중에서 실제로 여자아이를 보았다고 말합니다. 수연이의 원귀는 후에 새엄마에게 복수합니다. 장농에서 엑토플라즘을 쏟아내며 나오는데 삭제된 필름에는 여자아이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원귀를 제외하고, 영화에 보여지는 것은 수미가 만들어낸 2명의 허상(새엄마,수연이)과 수미와 아빠 총4명이 보여집니다. 수미는 자신과 새엄마의 이중 인격이었기에 1인2역 인것이고(1인3역이 아닙니다) 수연이는 아직도 귀신인지 수미가 만들어낸 허상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새엄마에게 복수하는 수연이와 수미옆에있는 수연이가 동일한 존재인지 아닌지도 역시 알수없습니다. 그러니 확실히 살아서 존재하는 것은 수미와 수미의 아빠 이 둘입니다.


이상으로 질문 답변 형식으로 몇가지 적어보았습니다. 제가 적은 답변들에는 제 자신의 생각이 들어가 있으니 다른분들의 의견과 틀릴수 있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쯤에서 글을 마치겠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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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설명이 잘 된 감상평    : http://besito.egloos.com/4636337


Tuesday, January 14, 2014

영화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source: http://blog.ohmynews.com/specialin/343221

영화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다

영화 여행 2010/09/11 07:18 꺄르르
영화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은 대단한 작품입니다. 놀라운 영화란 얘기는 미리 듣던 터였는데 과연 입소문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느낄 수 있네요. 영화에 대해 인상비평을 하기보단 영화에 담긴 주제의식과 장치들에 대해 가름하고자 쓴 글입니다. 따라서 아래에는 영화 내용이 잔뜩 나옵니다.

왜 여자주인공 이름이 뜬금없이 복남이일까?

이름 김복남(서영희)부터 뭔가 찝찝합니다. 여자 이름이 김복남이라니! 물론 굳어진 성관념을 넘어서 여자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남자이름을 쓸 수 있습니다. 성별에 따라 이름이 딱 정해진 건 아니니까요. 요즘엔 어여쁜 남자이름도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나 김복남이란 이름은 성에 얽매지 않는 자유로움을 뜻하기보단 예전 주말연속극 <아들과 딸>의 후남이란 이름과 마찬가지로 여성이 남자란 사슬에 갇혀있단 걸 드러냅니다.

태어나자마자 자신이 바라지 않아도 평생 짊어져야 하는 김복남이란 이름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업신여기겠다는 이 세상의 주홍글씨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인두질 당하듯 김복남이란 이름은 복남이라 불리는 여성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지요. 여자가 복있는 남자(복남)라 불리는데, 복되게 산다면 그게 더 야릇하겠지요.

복남이란 이름처럼 복남이의 삶은 펀펀하지 않습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뭍에 가본 적 없는 섬여자 복남이는 온갖 등쌀과 닦달, 성폭행과 발길질에 시달립니다. 어쩜 저럴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안타까운 장면들이 이어지지만, 저런 모습은 영화라서 저렇게 찍은 게 아닙니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미처 몰랐더라도 옆집에서 벌어지는 일이기 십상입니다. 복남이의 고통은 한 여자의 수난이라기보다 여자라서 겪는 고난을 보여주니까요.
아빠란 남자에게 예쁨을 받고자 하는 딸 '연희'는 '여자'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 계보을 드러낸다


때리는 남자들보다 어정쩡하게 말리는 여자들이 더 밉다

이 영화는 단순히 남자들이 여자들을 이렇게 괴롭힌다는 걸 이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성차별을 오싹하게 그려내죠. 복남이의 남편이나 시동생보다 관객들로 하여금 울컥하게 하는 사람들은 동호할매, 파주할매, 순이할매, 개똥할매들, 그리고 서울 친구 해원(지성원)입니다. 이들은 권력에 대들지 못한 채 애오라지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만 입방정 떠는, 일상에서 어렵지 않게 만나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꼬락서니죠.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어처구니없는 옛말을 잠깐 들여다보면, 왜 이런 말이 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할매들은 복남이가 쥐어터지고 쓰러진 채 헉헉대는 꼴을 보면서 조금 안쓰러워하지만, 그렇다고 복남이의 편에 서지 않습니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운 까닭은 이런 일이 빚어지는 얼개엔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기 때문이죠. 이 땅의 쌔고 쌘 시누이들은 올케가 자기 엄마에게 숱하게 머리털이 뽑히고 나서야 말리는 체 하지만 툭하면 뺨을 맞아야 하는 틀거리에 대해 꼬투리 잡진 않았습니다. 다만 너무 호되게 조지지 말라고만 할 뿐.

이런 시누이들처럼 이 할매들은 가부장제에 길들여진 여자들의 모습을 고스란히 알려줍니다. 여자들이 일을 도맡아 하는데도 ‘남자가 있어야 된다’는 얘기를 입버릇처럼 뇌까리고, 여자이면서도 여성을 낮잡으며 못 미더워하고 남자에게 기대려는 모습은 가부장제가 얼마나 여자들을 노예화하였는지 딱 까놓고 보여줍니다. 이런 여자들을 지켜보기란 메스꺼우면서도 스잔하지요.

그 무엇이 여자들로 하여금 남자들에게 굽실거리며 주눅 들게 만드는가?

그런데 가부장제에 왜 여자들이 굽실거리는지 이 영화는 놀랍게도 건드립니다. 일상에서 차별을 받으며 오랜 세월 종살이하였던 생활문화가 여자들을 주눅 들게 하고 미욱하게 만들었지만, 이것만으론 모자랍니다. 여자란 남자를 섬기고 떠받들어야 한다는 말뚝을 박는 게 있으니, 바로 남성 입맛대로 이뤄지는 성관계입니다.

아내가 집안에 있는데도 다방여자를 불러다 안방에서 성관계를 맺는 모습은 좀 심하다 싶지만, ‘성관계의 진실’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성싶습니다. 성이란 보수성을 지닌 영역에선 남자는 ‘성욕의 주체’이지만 여자는 ‘남자들의 대상’으로 남아있으니까요. 성관계의 가지런함은 아직 만들어내지 못 했습니다. 여자들이 일부일처제란 허울을 믿고 결혼을 하지만, 남자들은 사부자기 안방에서 야동을 보고 바깥에서 걸핏하면 성매매를 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더 소스라치는 건 이런 뒤틀린 성관계가 여자들로 하여금 울컥하게 하기보다 도리어 남자들 앞에서 고분고분 해지도록 만든다는 점입니다. 왜 자기 남편들을 다 죽게끔 한 치매할배가 곧 할매들에게 치켜세움 받았을까요? 할매들이 앞 다투어 치매할배의 ‘남근’에 끄달렸기 때문입니다. 일을 하지 않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맹꽁이잎’만 먹는데도 치매할배가 어엿하게 살 수 있는 까닭이죠. 진짜 여성해방을 이루려면 ‘남근’에서 벗어나는 한다는 말처럼 들리게 됩니다. 


더러운 리코더를 닦지도 않고 입에 문 복남이, 리코더에 맞아 쓰러지다

따라서 리코더는 아주 상징성 강한 장치로 쓰입니다. 리코더의 생김새를 굳이 남근과 견줄 까닭이야 없지만, 이 영화에선 남근의 대리물로서 작동하죠. 어린 복남이가 남이 물던 리코더를 닦지도 않고 입에 무는 장면도 복남이의 앞날을 가늠하게 하고, 남자애들이 리코더로 복남이를 때린 뒤 복남의 몸을 들추는 것도 이런 맥락입니다.

자신을 짓밟고 욕보이는, 더럽고 아니꼬운 남성질서에 구멍을 내고자 복남이는 낫을 들고 이리저리 휘두릅니다. 그러나 낫만으론 남성질서가 무너지지 않자 영화 막바지에 다른 곳도 아닌 남근을 겨냥해서 쇠망치를 내리칩니다. ‘남근’이란 남성권위에 치이고 족대김 당한 복남이는 어디를 부셔야 하는지 잘 알고 있던 것이죠.

하지만 한 여자가 대든다고 길고긴 세월 이뤄져온 남성지배가 휘우듬하지 않습니다. 남근질서는 아주 굳세고 검질기죠. 그리하여 복남이는 총에 맞아 죽지 않고 리코더에 ‘꽂혀’ 죽습니다. 그것도 자신을 건져주리라 믿었던 서울 친구에게 말이죠. 포스터에서 복남이와 해원이의 모습은 많은 걸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도 피 흘리며 남성사회를 욕망하는 수많은 여자들의 괴로움과 서글픔을.

세상의 악마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친절한 복남씨>의 탄생!

영화 <악마를 보았다>가 복수의 올바름을 물었다면,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은 한 발 더 나아갑니다. 세상의 악마들에게 침만 뱉지 말고, 그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고 있냐며 묻습니다. 서울 친구가 잘 보여주듯 옆 사람을 악마로 만들고 세상살이를 섬뜩한 지옥으로 만드는 것은 사람들의 고개돌림입니다. 무관심을 머금고 사회는 갈수록 끔찍해집니다.

해원이가 복남이의 편지를 진작 뜯어보았다면, 조금 더 용기를 갖고 사회사달에 입을 열었다면 어땠을까요? 복남이의 고통은 보다 줄어들었을 테고, 해원이도 그렇게 쉽게 정리해고 당하지 않았겠죠. 사회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곳이란 생각의 끈을 놓아버리면, 불쌍한 할머니를 매몰차게 내쫓고 후배 귀쌈을 아무렇지 않게 올려붙이는 괴물이 되기 십상입니다.

김기덕 영화와 박찬욱 영화가 불편함을 안겨주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을 극장으로 불러 모으는 까닭은 끈덕진 폭력과 성이란 매체, 그 안에서 빚어지는 사람살이의 고약함을 잘 그려내기 때문이지요. 이 영화는 ‘김기덕 세계관’에다 <친절한 금자씨>가 버무려진 느낌입니다. 그야말로 <친절한 복남씨>의 탄생입니다.

Sunday, October 13, 2013

영화 -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

화이 영화에 관한 두 개의 글.

1. http://mrmoon7.blog.me/90182613561
2. http://sk0279.blog.me/10177732649

화이의 아버지에 대한 재밌는 추리:
source :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3&dirId=30305&docId=182244317&qb=7ZmU7J20&enc=utf8&section=kin&rank=1&search_sort=0&spq=1&sp=1&pid=RDDI2U5Y7vossvml5qGsssssstd-143660&sid=Ull6ynJvLBgAACIlLKA 에서 두번째 답변 중에서

//////////////////////////[발췌 시작]////////////////////////////////////////

제 생각엔 개연성 같은 걸 따지면
석태가 친아버지가 되야 맞다고 생각하거든요.

강간했던 시기로 따지면 화이의 나이와 맞지 않아요.
적어도 10년 이상의 차이가 나버리죠.
제가 원하는 방향, 나름의 생각으로 혼자 프리퀄 써놨었는데요...



성인이 된 석태와 영주 사이에 아이가 생겼고(피해자 가해자지만 영주에게 굴레같은 관계라서 함께할 수 밖에 없다고 가정하면요.) . 석태는 범죄로 인해 영주의 임신사실을 모른채 감옥에 간다. 영택은 영주의 임신 사실을 알고 부인사이에 아이가 없던 차에 자신이 키우겠다고 한다. 영주는 부잣집인 영택의 집에서 아이가 크는게 옳다는 생각이 들어 아이를 보낸다. 석태는 출소 후 아이의 존재와 영택과의 관계에 크게 분노하고 자신의 아이마저 뺏어간 영택에게 복수할 생각으로 자신의 아이를 자신이 직접 납치한다. 영주는 발목에 족쇄가 채워진채 영택에게 가지 못하고. 화이를 다시 품에 안는다. 영주가 화이를 데리고 도망치던 날. 석태에게 들켜 발가락이 잘린다.



임형택이 친아버지었어도 석태가 납치했을거라는 걸 알고 있었을거같아요. 아이를 석태에게서 자신들이 찾지 않고 돌려주길(반성하길) 바랬던게 아닐까하네요....기도하던 형택을 생각하면요...

아무튼 괴물이 키포인트인거같은데요. 석태는 괴물이 무섭다는 화이를 괴물에게서 구해주고자 그런 잘못된 부정(친부로서의)을 택한게 아닐까 해요. 자신이 경험한대로 괴물로 만들어서 괴물을 없애려고.
괴물을 삼켜 없애는 매개체가 선을 상징하는 임형택이었을수도 있겠네요. 석태는 그에게 다리를. 화이는 그의 목숨을 빼앗고 괴물을 삼키죠.

(+ 마지막 총을 겨누는 장면을 생각하니... 석태가 친부가 맞을 확률이 더 높은 거 같네요. 냉정하고 잔인한, 동료들이 죽어도 눈물 한방울 안나고 표정 변화도 없는걸로 봐선 감정 자체가 없는 냉혈인 석태가 자신에게 총을 겨누던 화이를 용서하려고 하잖아요. 그게 혈연이 아니고서야 다른 감정으로 설명할 길이 없는거 같아요.)

//////////////////////////[발췌끝]////////////////////////////////////////

Friday, August 3, 2012

펌: <다크 나이트 라이즈> 천재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의 작품세계

펌: http://ch.yes24.com/Article/View/20284

<다크 나이트 라이즈> 천재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의 작품세계




가면의 기억, 그 퍼즐조각 찾기

이것이 “놀란” 스타일!





<다크 나이트> 이후 4년 만에 선보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세 번째 배트맨 이야기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트릴로지로서의 충실한 3부작이다. <배트맨 비긴즈>는 슈퍼 히어로 배트맨의 탄생을, <다크 나이트>는 절대 악의 상징으로서의 조커를 등장시켰다면,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는 베인(톰 하디)이라는 테러리스트를 고담시의 새로운 상징으로 등장시킨다.



글
최재훈









팀 버튼의 <배트맨>, <배트맨 리턴즈>는 악인이라는 깨진 거울을 통해 영웅을 비추는 철학적 블록버스터였다. 이어 배트맨 시리즈의 연출을 맡았던 조엘 슈마허의 <배트맨 포에버>는 서민적 이미지의 마이클 키튼 대신 발 킬머를 배트맨으로 내세우고, 짐 캐리, 토미 리 존스, 니콜 키드만, 크리스 오도넬 등의 화려한 캐스팅으로 출발했다.



차기작 <배트맨과 로빈>은 배트맨을 보다 대중적이고 섹시한 조지 클루니로 바꾸면서 보다 대중적이고 가벼운 블록버스터의 길을 택했다. 여기에 아놀드 슈왈제네거와 우마 서먼, 알리시아 실버스톤 등 당대 최고의 스타들이 총출동했다. CG와 특수효과는 더욱 강화되었고, 각종 무기와 액션 씬들이 숨 돌릴 틈을 주지 않는 초호화 블록버스터였다.



조엘 슈마허는 음울하고 철학적인 팀 버튼의 배트맨을 지우고 자신만의 경쾌한 배트맨을 만들려고 했지만, 역설적으로 배트맨이여 영원하라고 시작한 조엘 슈마허의 시리즈는 배트맨 시리즈의 끝을 알리는 종언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을 만나기까지 관객들은 8년을 고스란히 기다려야만 했다.





새롭게 쓴 배트맨

: <배트맨 비긴즈>, <다크 나이트>, <다크 나이트 라이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팀 버튼이란 거대한 벽을 뛰어넘고 조엘 슈마허에 의해 구겨진 이미지를 되살려야만 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성장드라마의 어두운 리얼리티에 연기파 배우들의 안정된 연기를 통해, 믿음직하고 그럴 듯하게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이 되어가는 과정을 선보인다. 선택은 프리퀄이다. <배트맨 비긴즈>는 우발적 범죄로 부모를 잃은 브루스 웨인(크리스천 베일)의 벗어나지 못하는 어린 시절의 상처, 그 트라우마를 끌어안는다. 공포와 죄책감, 분노에 휩싸인 브루스는 어둠의 사도들에게 무술을 전수받고 고담 시로 돌아온다.



팀 버튼의 영화보다 훨씬 더 무겁고 철학적인 <배트맨 비긴즈>는 반듯하면서도 날카롭고 동시에 기괴한 이중성을 지닌 크리스천 베일을 만나 날개를 달았다. 배트맨은 선천적 재능 혹은 우연한 사고로 얻은 초능력이 아니라, 스스로를 창조한 창조주이자 피조물이며, 브루스 웨인의 가면에 배트맨을, 배트맨의 가면에 브루스 웨인을 숨겨야 하는 이중성에 사로잡혀 있다. <배트맨 비긴즈>는 영웅이 되어야만 하는 필요성과 영웅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영웅의 가면을 뒤집어 쓴 채 이중생활을 해야 하는 브루스 웨인, 배트맨의 철학적 고뇌에 초점을 맞춘다. 가장 두려운 것은 바로 내 안에 숨어 있으며, 심연을 들여다보는 자만이 승리할 수 있다는 테마를 되풀이 한다.













이어 히스 레저의 조커는 <다크 나이트>의 핵심이 되었다. 잭 니콜슨 이외의 배우가 연기하는 조커는 상상할 수도 없다는 평가를 얻었던 팀 버튼의 <배트맨> 20년 뒤 히스 레저는 강렬한 매력과 아우라를 뿜어낸다.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의 역할은 절대 악의 존재이며 동시에 배트맨을 존재하게 만드는 거울의 양면이 된다. 악인이 없으면 영웅의 존재도 필요 없으며, 영웅과 악인은 서로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만 동시에 제거해야만 한다.



배트맨과 조커의 대립 항을 통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선과 악이 얼마나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있으며, 그 얇은 막 하나만 제거하면 순식간에 뒤섞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에 고인이 된 히스 레저의 광기 어린 연기까지 어우러져 새로운 신화로 태어났다.













<다크 나이트> 이후 4년 만에 선보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세 번째 배트맨 이야기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트릴로지로서의 충실한 3부작이다. <배트맨 비긴즈>는 슈퍼 히어로 배트맨의 탄생을, <다크 나이트>는 절대 악의 상징으로서의 조커를 등장시켰다면,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는 베인(톰 하디)이라는 테러리스트를 고담시의 새로운 상징으로 등장시킨다. 지옥 같은 감옥에서 살았던 베인은 빈부 격차가 사회의 불안으로 이어지는 자본주의를 비꼬면서 폭동을 통해 기존 가치관을 무너뜨린다. 베인의 행동은 처해진 입장에 따라 테러이면서 동시에 계급혁명이 되는 모순 속에 있으며, 베인은 배트맨과 대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고담시의 시민 전체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이제 정체성의 고민은 배트맨과 조커만의 몫이 아니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통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한 명의 영웅이 짊어졌던 고뇌와 사회적 역할을 시민사회 전체로 확장시켰고, 그 질문은 고스란히 관객에게 돌아온다.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그리고 시민사회의 중심이 시민이라면, 이제 배트맨이 없는 세상도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역설적 해답을 보여준다. 동시에 꿈의 세계마저 체계와 규칙을 갖춘 세계로 재창조해낸 <인셉션>처럼 크리스토퍼 놀란의 고담시는 상상의 도시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라고 주장한다. 160분이라는 어마어마한 러닝 타임을 통해 놀란 감독은 ‘배트맨’이라는 영웅을 서서히 지우고, 레지스탕스와 점령군이 맞서 싸우는 거대한 시가전을 준비한다.



<배트맨 비긴즈>가 영웅의 탄생을 알리는 1부였다면,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영웅의 소멸을 묵도하는 3부작의 거대한 엔딩을 준비했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는 믿을 수 없게도 ‘경찰’이라는 존재가 배트맨이 없는 자리에 ‘영웅’이 해줘야 할 역할을 해내고, 이들에 대한 믿음은 배트맨이 영웅의 가면을 벗고 브루스 웨인이란 개인으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보기에 따라 앞선 2부작에 비해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예측 불가능한 결말로 나아가는 영화가 아니라는 점, 배트맨 시리즈의 종언처럼 보인다는 점 때문에 아쉬움이 남을 수도 있지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이미 3편의 영화를 통해 해야 할 이야기를 명확하게 품어내고 정리해낸다.





꿈은 언제나 중간부터 시작된다

: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작품들







<메멘토>







<인썸니아>



2000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현재를 이끈 영화 <메멘토>는 그 결말을 알고 봐도 여전히 감탄이 나오는 영화이다. 시간과 공간을 자르고 이어 붙여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가는 영화적인 마법은 텍스트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영화적 장르의 아우라를 돋보이게 만든다.



영화 속 주된 시간은 주인공 레너드(가이 피어스)의 시점에서는 거꾸로 흐른다. 하지만 동시에 진행되는 흑백 필름의 관찰자 시점은 순차적으로 흐른다. 레너드는 아내가 강간 살해된 뒤 복수를 위해 살아간다. 15분이라는 기억을 다시 되돌리기 위해, 자신의 몸에 끊임없이 무언가를 새겨 넣어야 하는 살아있을 수 있는 주인공의 지독한 현실을 기승전결이 없는 뒤엉킨 진공상태로 밀어 넣어버리는 음울한 기운은 <메멘토> 전체를 관통한다. 관객은 레너드처럼 피곤해진다. 결국 복잡한 실타래가 풀려 마침내 결백이 증명되는 그 순간에도 관객들에게 짜릿한 쾌감을 선사하지 않는다. 피곤하고 지쳐버린 주인공의 감정 그대로, 기억은 숨 가쁘고 복수는 허무하고, 기억은 여전히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2002년 <인썸니아>는 알래스카라는 위압적인 자연 자체가 하나의 숨 막히는 폐쇄적인 공간이 되고, 주인공인 형사는 자신이 무엇을 쫓는지조차 혼돈스러워한다. 주인공의 목적은 범인을 잡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자신의 과거와 현재에 묻어 있는 기억의 흔적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다. 그들은 늘 두려움과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고, 그래서 불면증에 빠진 사람처럼 그들의 몸은 늘 지독한 피로에 휩싸여 있다.







<프레스티지>







<인셉션>



기억을 가둔 만큼 주인공을 옭죄면서, 교차된 시간으로 긴장감을 주는 놀란 감독 특유의 연출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때론 지나친 과잉이 오히려 결핍이 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2006년 <배트맨 비긴즈>와 <다크 나이트> 사이에 만들어진 <프레스티지>는 과유불급의 교훈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였다. 놀란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천재와 맞선 불운한 경쟁자의 이야기를 보여주는데, 충격적으로 보이고 싶은 반전이 과잉된 의식과 형식 때문에 비약처럼 느껴지는 아쉬운 작품이었다.



그리고 2010년 <인셉션>을 통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웅장하면서도 동시에 정교한 크리스토퍼 놀란 만의 작품세계를 널리 알린다. 간단한 기계장치 한대만 있으면 한 사람의 꿈속으로 들어가 그의 무의식에 자리 잡은 생각을 훔쳐낼 수 있는 미래의 세상, <인셉션>의 이런 소재와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다. 소재와 이야기를 사건으로 구조화하는 방식이나 시각화해낸 장면들은 더 뛰어나고 놀랍다. <매트릭스> 시리즈에서 한발 더 나아간 무중력 액션의 연출이나 더 강력해진 비주얼 규모는 매력적이다.



형식의 차원에서 <인셉션>은 우리의 뇌를 괴롭혔던 <메멘토>보다 더 복잡하고, 일기와 메모를 매개로 역전된 시간구조를 실험한 <프레스티지>와도 그 궤를 같이 한다. 구조적으로 뒤엉킨 <인셉션>의 내러티브는 꿈의 국면으로 설정된 스토리의 이전 단계들을 기억해내도록 돕는 단서로 밑그림을 그려내기 때문에 관객들은 스스로 하나의 스토리를 구성해야 하지만, 이 또한 쉽지 않다.



꿈과 기억, 망상, 환영이 뒤섞인 <인셉션>의 이야기는 우리의 꿈이 늘 중간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일깨우듯, 발단과 결말의 손목을 댕강 자른 채로 시종 진행된다. 관객은 사건들 사이의 시간적, 인과적 연결점을 스스로 찾아, 복잡한 기억의 기능을 활용하여 미로에서 빠져나가는 출구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메멘토>에서 시작된 놀란 감독의 독특한 화법은 테크놀로지의 힘을 빌려, 점점 더 미궁을 연출하고 있는데, 보기에 따라 <인셉션>은 그 화법이 지나친 과잉으로 읽히기도 한다는 점에서 배트맨 시리즈를 제외한 나머지 작품을 두고 보자면 <인셉션>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작품세계의 정점을 찍어주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이제 하강하거나, 궤를 달리해야 할 시점이 왔다는 말이다.













<인셉션> 이후 놀란 감독은 배트맨 시리즈의 종결을 선언하며, 앞선 두 작품을 마무리 한다. 그는 이 3부작을 통해 앞선 두 편의 기억과 단편들을 계속해서 건드리고 여기저기 흩어졌던 이야기의 퍼즐을 모은다. 따라서 완벽히 이 영화를 즐기기 위해서는 <배트맨 비긴즈>와 <다크 나이트>를 복습해보는 것이 좋다. 이미 그가 던져놓은 수많은 퍼즐 조각들은 우리의 머릿속에서 지워져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배트맨과 조커가 사라진 8년, 영웅도 절대 악도 없었던 고담 시에 다시 등장한 악당, 고담시의 운명은 배트맨에게 달려있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놀란 감독은 배트맨이라는 영웅 한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지 않는다. 놀란 감독의 입장에서 배트맨은 일그러진 채 억지웃음을 지어야 하는 조커의 대립 항이고, 트라우마를 숨기기 위해 가면을 덧입고 살아가야 하는 나약한 개인일 뿐이다.



놀란 감독의 다른 작품에 비하면 배트맨 시리즈는 대립이 분명하고, 그 결말도 명확한 편이다. 극의 긴장감을 뒤엉킨 ‘시간’이 아니라, 개인의 기억을 지배하는 과거를 현재의 가면으로 분명하게 재현해내기 때문이다. 여기엔 단기기억상실, 마술, 불면증, 꿈의 지배보다 ‘이중성을 지닌 영웅’의 이야기에 우리가 더 익숙한 탓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