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October 16, 2013

kiaf 2013 - 임주연 작가: 평범한 일상을 비범한 작품으로


2010 banalscape 전시회 : http://blog.naver.com/jojako?Redirect=Log&logNo=40165777759

source: http://artnews.me/?p=12878 중 임주연 작가 부분 발췌


2012 OCI YOUNG CREATIVES
[출처] 김은형_임주연展 |작성자 다다


임주연_무제_캔버스에 유채_145.5×112cm_2012

스치듯 지나가는 시간의 주름
 ● 임주연은 지난 10년 동안 '사진의 재현성'과 '영상의 시간성'을 자신의 회화 작품에 적극 끌어들여 왔다. 특히 영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후의 개인전 『Extremely Ordinary』(2009년), 『Banalscape』(2010년), 『Return』(2011년) 등에서는 사진의 방법론을 회화에 적극 동원하는 작품에 집중했다. 작가 자신이 내세운 전시 주제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듯이, 임주연의 작품은 지극히 평범한(혹은 따분하거나 시시한, 덧없는) 일상사에서 포착한 자신의 신체를 구상 양식으로 그려낸 것이었다. 이번 개인전은 『Skim』이라는 주제를 내걸었다. 역시나 '스치듯 지나가는' 삶의 한 순간을 포착한 그림이다.
임주연_무제_캔버스에 유채_162×130.3cm_2012

이번 개인전에서도 이전의 작품 방법론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그 제작 과정은 다음과 같다. 
(1)사적인 공간에서 자신의 몸을 감쌌던 외피(옷)를 벗는다.
(2)그 탈의(脫衣) 장면을 카메라 셀프타이머를 이용해 연속적으로 찍는다. 
(3)그렇게 찍은 여러 사진 중 일부를 선택하여 캔버스에 확대해서 그린다. 

임주연의 작품 제작 은 결코 새롭거나 대단한 발상이 아니다. 문제는 이 평범한 발상을 비범한 작품으로 끌어올리는 조형 능력일 텐데, 임주연 작품의 비평에서 터치해야 할 핵심도 바로 이 대목이다. 임주연에게 사진은 아이디어 스케치 혹은 밑그림 역할을 맡고 있다. 더 큰 의미로 작품의 기초 설계요, 뼈대 구성이라 해도 좋다. 그의 작품은 자신의 신체 움직임의 한 찰나를 정지된 이미지로 붙잡은 사진에서 출발한다. 그리하여 임주연은 사진 촬영을 통해 몇 가지 흥미로운 형상을 얻어낸다.
임주연_무제_캔버스에 유채_162×130.3cm_2012

첫째, 사진을 찍은 결과는 찰나의 정지 이미지이지만, 신체와 옷의 형상이 천태만상이다. 옷을 벗는 동작에도 긴장과 이완, 에너지의 강약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얼굴이나 팔 다리, 다른 신체 부위가 적극 개입되는 격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조용히 단추를 여미는 정도의 온순한 동작도 있다. 둘째, 그 사진이 마냥 정적으로만 보이지도 않는다. 신체 움직임의 앞과 뒤에는 언제나 유동적인 시간이 안착할 여백 혹은 틈이 있다. 그래서 옷을 벗는(혹은 입는) 동작과 바로 그 다음 동작, 그리고 그 다음의 시간과 상황 전개를 예감해 보는 즐거움이 크다. 실제로 작가는 인물 형상의 연속성을 확연히 드러내는 2면 혹은 3면의 연작 회화를 제작하기도 한다. 셋째, 미리 구도를 고려하지 않고 찍은 사진이어서 오히려 파격의 프레임이 탄생한다. 대체로 옷을 벗는 행위에 집중되어 있어 목 위의 얼굴 부위는 온전히 드러나지 않는다. 그 '얼굴 없는 신체'가 묘한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카메라의 눈은 시간의 흐름을 시각화하는, 예컨대 형상이 빠르게 휙 소리를 내면서 스쳐 지나가듯 흐릿한 이미지를 담는다.

임주연_무제_캔버스에 유채_162×130.3cm_2012

사실상 작품의 골격은 이 사진에서 결정된다. 그 다음 과정으로 임주연은 캔버스에 사진을 크대 확대해서 그린다. 그렇다고 사진 원본을 그대로 베끼지는 않는다. 그렇게 했다면, 아마도 그의 작품은 숨이 착 가라 앉은 포토리얼리즘 수준에 머무르고 말았을 것이다. 이 단계에서 마침내 회화 기법의 미덕이 적극 동원된다. 임주연은 카메라의 눈으로 포착한 이미지에 적극 기대면서도 손의 표현, 요컨대 수공(手工)의 특성을 결코 잃거나 잊지 않는다. 엉뚱하게 잘려나간 화면의 프레임, 느닷없이 절단된 신체 부위의 야성, 과감한 클로즈업의 임팩트, 미끄러지며 꿈틀대는 붓 자국, 우연인 듯 뚝뚝 흘러내리는 물감의 얼굴, 흐릿한 색채의 알 수 없는 불안, 옷 주름의 팽팽한 긴장….

임주연_무제_캔버스에 유채_194×150cm_2012

임주연은 이제 캔버스 위에서 '회화의 잔치'를 펼친다. 우선 사진 작업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그 일체의 회화적 행위는 단순히 형태를 만들고 색을 칠한다기보다는 카메라에 찍힌 정지된 과거 자신의 한 순간을 다시 현재화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사진으로는 이미 완결된 시간, 갇힌 시간을 회화의 힘으로 활짝 해방시키는 작업이 아닌가 싶다. 자신의 몸으로 자신의 몸을 그려대는 이 현재화 작업을 통해 임주연은 회화 공간을 '진행형'의 영원한 미완의 시간으로 끊임없이 밀어 넣고 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의 회화는 더 이상 미래라는 시간이 탈각된 박제된 버전이 아니라 꿈틀대는 살아있는 생명으로 우리 앞에 가쁜 숨을 내쉬고 있다. 그 숨결의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이야말로 회화의 진정한 매력이요 또한 회화의 존재 이유가 아닐까? 우리가 미술의 그 어떤 장르보다 회화를 갈망하는 이유 중 하나는 수공 작업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인간의 손이 효용을 점차 상실해 가는 테크놀로지 사회에서, 회화는 첫걸음에서부터 마지막 완성까지 작가 스스로의 신체 작용이 지배하는 예술이다. 이 점에서 회화는 장르의 고유성을 확보하고 있다. 회화에 대한 갈망은 근원적으로 사물에 대한 애정, 즉 페티시즘(fetishism)에 기인한다는 학설이 유력하다. 라캉은 페티시즘의 근원을 인간이 어머니의 자궁에서 분리된 이후의 끊임없는 상실감, 무의식의 기아감에서 찾지 않았던가. 바로 이 수공의 특성이 캔버스 화면과 충돌하며 부싯돌 같은 섬광이 일어나는 지점에서, 임주연의 작품은 "나는 회화다!"라고 당당하게 외친다. 그리하여 사진으로는 온전히 걷잡을 수 없었던 사물에 대한 애정을 회화라는 손으로 따뜻하게 애무하는 것이 아닐까?

임주연_무제_캔버스에 유채_194×150cm_2012

신체, 붓과 물감이 서로 거친 호흡을 주고받으며 일궈내는 화면 위의 수많은 질료의 이랑은 시간의 주름을 직조해 간다. 그 촉각의 감성으로 불러내는 페티시즘이야말로 사진이나 영상의 평면(superflat)과는 질적으로 다른 회화 표면의 감동이 아닌가. 이렇듯 임주연은 회화와 뉴미디어의 조형적 순환을 자연스럽게 포용하면서도 회화의 독립성과 고유성을 지켜가고 있다. 달리 말하면, 회화가 회화여야 함을 부르짖으면서도 시각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새로운 탈출구를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임주연의 작품은 '사진을 딛고 다시 일어서는 회화'라고 해야 할까? ● 임주연의 최근 작업은 신체 동작보다는 옷의 형상 자체를 더욱 부각시키는 변화를 보인다. 신체의 일정 부위가 대형 화면에 크게 클로즈업되어, 이전 작업에서 보이던 인물의 동작은 크게 약화되었다. 얼핏 보면 인간의 신체와 무관한 미시세계의 한 부분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추상표현주의 회화의 역동적인 필치와 구성을 대하는 느낌이다. 신체 움직임이 빚어내는 미묘한 옷의 표정은 또 다른 알레고리적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임주연_무제_캔버스에 유채_194×150cm_2012

임주연은 왜 하필 옷을 그릴까? 옷은 몸을 감싸는 '제2의 피부'다. 옷은 사회적 문화적 정체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공적 언어다. 또 누군가가 말했다. "옷은 가장 작고 사적인 은밀한 공간이다." 그러니까 옷은 '나(주체)'와 '타자(세계)'가 만나는 경계다. 옷은 주체의 마지막 껍질이요, 타자와 소통하는 최초의 장소다. 임주연은 자신의 은밀한 방에서 옷을 벗는다. 타자의 공적인 시선에 머물러 있던 '보이는 나'에서 속옷과 속살까지를 드러내 보이는 '보는 나'의 사적인 세계로의 노정이다. 그리고 '보는 자(촬영자)'와 '보이는 자(피사체)'와의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고, 다시 이 양자를 선택하고 번역하는 또 하나의 '해석자(작가)'를 통해 진정한 나를 찾는 여정이 이어진다. 임주연의 옷은 나와 세계와의 유무형의 경계, 혹은 '스치듯 지나가는' 그 경계의 애매모호한 시간의 겹을 파고든다. 옷은 인간 실존의 다른 이름이다. 

■ 김복기



[출처] 김은형_임주연展 |작성자 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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