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March 16, 2011

세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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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 (1839-1906)






자연을 원통형이나 구형. 원추형으로 받아들이세요.



세잔의 회화 표현법



사과는 보는 각도에 따라 빛에 따른 색감의 변화가 다양하다. 때로는 빨간색, 때로는 주홍색 등으로 색채가 수시로 변하는 것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사과에서 나오는 빛의 순간적인 변화를 그리기 위해 급급했다. 하지만 후기 인상파의 대가 세잔느는 언제 어디서나 영원히 변치 않는 사과의 고유 형태를 그리기 위해 몰두했다.

세잔이 영원히 변치 않는 사물의 형태를 그리기 위해 사용했던 기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색채분할법이었다. 눈에 보이는 실제적인 색을 그대로 칠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즉 색을 이루는 많은 조각들을 수없이 계산된 부분 부분에 적용해서 입체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둘째는 전통적인 명암과 원근법을 포기했다는 점이다. 사물이 갖고 있는 고유의 입체감을 살리기 위해 그는 전통적인 명암법을 포기하고 인위적인 명암을 만들었다.

또한 세잔은 형태를 완전하게 하기 위해 이를 왜곡시키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세잔의 작품에 나타나는 사물은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다. 세잔느의 사과가 마치 플라스틱처럼 맛이 없어 보이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세잔은 사물이 갖는 실제적인 명암이나 색채를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화폭 위에 나타나는 이 소재들은 실재감과 완벽한 형태감을 자랑한다. 이는 현대 회화의 발전을 예고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고, 세잔을 20세기 회화의 선구자로 부르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19세기가 낳은 현대회화의 아버지 : 현실적인 형태를 평면상에 구현하는 데 몰두. 2차원의 캔버스에 3차원의 모티브 추구. 대상을 그대로 파악하기 위해 기하학적 형태로 환원.



구도와 색채 등 회화를 '구조'로 생각하다: 그때까지 회화란 신앙심. 이야기. 윤리로 해석했는데 대상을 여러 각도에서 관찰-대상이 지닌 본연의 모습을 파악했고 그것을 표현하고자 노력함.



색채와 데생의 미묘한 관계 : 데생과 색채가 깊이 연관되어 있음 강조. 형태와 색채의 미묘한 밸런스를 찾기 위해 진지하게 고민.



있을 수 없는 구도란 없다. : 회화한 화가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자유로운 발상으로 그리는 것.







정물1 정물2 정물3 정물4 해골

개개의 과일들은 여러 시점에서 바라본 것처럼 왜곡되어 있으며,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그 위치 관계도 어딘지 미묘하게 어긋나 있다. 세잔은 완전한 접시의 형태를 위해 시점을 위로 이동한다. 완벽한 형태를 위하여 세잔느는 현실보다는 화면의 원리를 따른 것이다. 여기서《화면의 원리 》라는 말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현대 미술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말이 될것이다. 세잔은 완전한 접시의 형태를 위해 시점을 위로 이동한다. 완벽한 형태를 위하여 세잔느는 현실보다는 화면의 원리를 따른 것이다. 여기서《화면의 원리 》라는 말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현대 미술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말이 될것이다.



목가, 1870년,65 x 81cm

세잔느가 서른 한 살 되던 해 제작한 <목가>는 현실 너머의 남녀의 사랑을 환상적으로 다룬 작품이다. 세잔느는 1860년대 후반과 1870년대 그는 에로틱한 주제들을 즐겨 그렸는데, 이 작품도 성적인 환상을 담은 작품들 중의 한 점이다.

마치 연극 무대와 같은 화폭에는 신비스러운 밤 풍경이 묘사되어 있다. 섬인지, 강인지 모를 물가와 낮은 언덕을 배경으로 몇몇 남성과 여성들이 자리하고 있다. 누드로 그려진 여인들은 각각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뒤편으로 머리를 감으려고 몸을 숙이고 있는 여인, 화면 왼쪽의 노골적으로 자신의 몸을 드러내는 관능적인 포즈를 취한 여인,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경에 한 여인이 등을 보이고 돌아 누워있다. 이러한 여인들은 전형화된 포즈를 따른 전통적인 여성 누드의 도상들이다. 한편, 그림에 등장하는 남성들 역시 각기 다른 모습으로 그려졌는데 여성에 열중하기도 하고 무관심하기도 한 다양한 모습들이다. 특히 화면 중앙에 거만하게 턱을 괴고 누워있는 남자는 세잔느 자신의 모습으로 이 환상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있다.



오베르의 목을 맨 사람의 집,1872∼73년, 캔버스에 유채, 50 x 66cm

1872년 세잔느는 부인 오르탕스 피케와 갓난 아들과 함께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 sur Oise)에 정착했다. 당시 피사로는 오베르 근처의 퐁투아즈(Pontoise)에 살고 있었는데, 세잔은 2년 동안 오베르에 머물며 피사로와 함께 작업을 하곤 하였다. 그 무렵 그려진 이 작품은 피사로부터 받은 영향력으로 인상주의 화풍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초기 작품들의 특징인 화면 전체를 감도는 어두운 색조, 극단적인 대조, 에로틱한 주제들은 밝은 풍경화에 자리를 내어 주었다. 화폭에는 청명한 날씨, 밝은 햇살이 내리쬔다. 지붕에 흡수된 빛, 혹은 반사된 빛의 세밀한 감각들은 작은 붓질을 통해 전달된다. 이러한 빛의 떨림은 대상 자체의 밝은 색조를 고양시키고 있다. 그러나 인상주의자들이 추구하였던 일시적인 양상과 순간적인 장면에 대한 묘사는 찾아 볼 수 없다. 이미 화면에는 풍경의 기본적인 구조들이 조화와 리듬 속에 드러나고 있다. 탄탄한 구성, 지붕과 나무의 견고한 선과 면은 안정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세잔느는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피사로의 추천 덕분에 1874년 제 1회 인상주의전에 참여하였다. 이 작품은 <오베르의 풍경>, <모던 올랭피아>와 함께 인상주의전에 출품되었고 도리아 백작(le Compte Doria)은 비평가들의 악평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구입하였다. 이후 빅토르 쇼케(Chocquet)가 이 작품을 다시 구입하여 1889년 만국 박람회에 출품하였다.



현대적 올랭피아,1873-74년, 캔버스에 유채, 46 x 55cm

낭만적인 주제를 선택하여 어두운 물감을 두텁게 발랐던 세잔느 초기의 작품들은 들라크루아, 도미에, 쿠르베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초기의 화풍은 1872년경 오베르 쉬르 오아즈에서 피사로와 함께 작업하면서 점차 변화하였다.

1872∼1873년 그려진 이 작품은 세잔느 화풍의 변화를 보여준다. 세잔느는 이미 1866년 같은 주제로 그렸던 작품은 어둡고 무거운 작품이었던 데 반하여, 몇 년 뒤 다시 그려진 이 작품은 밝은 화면으로 바뀌었다. 밝은 화면, 선명한 색조, 형태를 생략한 재빠른 붓터치는 이미 세잔느의 화풍이 인상주의로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작품의 내용은 1865년 마네가 살롱에 큰 논쟁을 일으켰던 <올랭피아>를 언급하면서, 에로틱한 화가 자신의 환상을 담고 있다. <올랭피아>의 검은 고양이는 이 작품에서 강아지의 모습으로 그려졌고, 본래 마네의 그림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신사가 호기심에 가득 찬 눈길로 올랭피아를 올려다보고 있다. 세잔느 자신의 모습으로 그려진 이 신사는 사창가를 찾은 손님으로서 올랭피아가 창녀임을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자화상 자화상2 신문을 읽고 있는 세잔 아버지

1879~82 캔버스 유채 33.5×24.5cm

빈데르투르 라인하르트 컬렉션



필촉 하나 하나가 마치 건축 설계도처럼 견고하게 구성되었으며 이차원과 삼차원적인 공간의 균형도 조화롭다. 난색과 한색의 화음은 세잔느에 의해 신중하게 계산되어진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다.



과일, 냅킨, 우유병이 있는 정물, 1880, 캔버스에 유채, 600 x 730cm

폴 세잔느는 1872년에서 1873년 사이에 피사로에게 큰 영향을 받았으나, 결코 인상주의 그룹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근본적으로 매우 독자적인 화가였던 그는 인상주의를 미술관에 소장된 미술만큼이나 견고하고 확실한 것으로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평생 사물의 외관에 치중하는 인상주의를 대신하여 시간을 초월한 자연의 본질, 그 원형을 찾고자 했다.

1878∼79년경 그는 물리적인 실체의 외관을 고수하는 한편, 공간 속에서 구현되는 대상의 조형적인 가치와 구조에 눈을 돌렸다. 목욕하는 이들, 남 프랑스의 시골 풍경, 정물화와 같은 특정한 모티브를 반복하여 그리면서 조형적인 실험을 지속하였다.

1880년에 그려진 이 작품에서 이미 세잔느는 대상을 단순화시켜 추상적인 형태에 주목하고 있다. 몇 개의 사과와 가정에서 익숙한 가재 도구들이 탁자에 놓여 있다. 사물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 대신에 단순한 기하학적인 형태를 구축함으로써 형태 내부에 있는 구조를 표현하였다. 삐딱하게 놓여진 칼이 공간의 깊이를 암시하고는 있으나, 근본적으로 이러한 화면은 원근법의 전통적인 재현 방식을 전복시켰다. 쌓아 올린 사과들과 탁자 모서리를 따라가다 보면 시점은 하나가 아니라, 화면 밖으로 여러 개의 시점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다초점에 따른 형태의 탐구는 이후 브라크와 피카소로 하여금 입체주의로 나아가게 하였다.



푸른 꽃병, 1885∼87, 캔버스에 유채, 61 x 50cm

세잔느는 이 작품에서 활짝 핀 꽃의 형태 묘사보다는 색채의 미묘한 변화에 주의를 기울였다. 빛이 사물에 떨어지는 방식과 그에 따르는 색채의 변화라는 문제는 줄곧 세잔느의 화두였다.

이 그림에서 공간은 수직과 수평이 교차하면서 조밀하게 구축되었으며, 그 속에 위치한 정물들이 각각 균형 잡힌 부피감을 점하고 있으며, 꽃병은 화면 중심에서 정확하게 중심을 잡고 있다. 꽃병의 푸른색과 배경의 미묘한 푸른색의 조응은 캔버스 전체에 통일성, 조화를 꾀하고 있다.

이 작품이 그려지기 10년 전, 오베르 쉬르 오와즈에서 많은 꽃 그림을 그렸던 화가는 이 작품에서는 새로운 모티프인 사과를 첨가하였다. 세잔느는 꽃이 너무 빨리 시들어 버린다고 불평하며 한때 가쉐 박사에게 꽃 그림을 포기한다고 말한 적도 있었으나, 이 그림에 그려진 꽃은 사과와 어우러져 화면에 다채로움을 더하였다. 그렇지만 그 작품의 기본 바탕을 이루는 단순함과 절제가 르누아르의 꽃 그림에서 익숙하게 보아온 풍성함과 지나침은 찾아 볼 수 없다.

'푸른 화병'은 세잔느가 죽기 2년 전, 1904년 살롱 도톤느의 일부로 개최되었던 세잔느의 회고전에서 대중 앞에 첫 선을 보였다.



커피포트와 여인, 1890∼95년, 캔버스에 유채, 130.5 x 96.5cm

학자들은 이 작품의 모델이 세잔느의 부인인 오르탕스 피케, 혹은 자 드 부팡의 세잔느의 저택의 하녀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사실상 이 작품이 누구의 초상인가는 전혀 중요치 않다.

마치 정물이나 기념비적인 동상처럼 굳은 모습으로 앉아 있는 여인은 기하학적인 형태에 있어서 커피포트와 매우 흡사하다. 이러한 기하학적인 형태는 대상의 객관성만을 보여줄 뿐, 모델의 성품, 내면의 심리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자연을 원통과 원뿔, 원추로 보아야 한다"는 세잔느는 유명한 주장은 이 그림에서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다. 그림의 배경은 캔버스와 평행을 이루는 엄격한 정면성을 나타내고 문은 강조된 직각을 보여주는 기하학적인 형태로 환원되었다. 여인의 견고한 두 팔은 커피포트처럼 원통으로 처리되었다. 세잔느가 대상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고 믿었던 이러한 기하학적인 구조들은색채로 인하여 더욱 풍부해졌다. 세잔느는 작은 색면을 조밀하게 겹쳐 형태를 만들고 입체감을 형성한다.

세잔느의 작품에 나타난 공간 탐구, 대상의 기하학적인 관계에 대한 연구는 1908년 브라크의 첫 번째 입체주의 작품 <레스타크의 집들>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세잔느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모델의 개인의 표현에 대한 고의적인 무관심은 큐비스트들의 추상회화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노란의자의세잔부인



카드 놀이하는 사람들1 2, 1892∼96년, 캔버스에 유채, 47 x 56.5cm

세잔느는 카드 놀이를 주제로 하여 1890년부터 1896년까지 5점의 작품을 완성하였다. 5점의 작품들은 카드 놀이중인 사람들의 수도 작품마다 다르며 작품의 크기도 각각 달라, 세잔느가 같은 주제로 일련의 조형 실험을 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현재 반즈 재단(Foundation Barnes)에 소장되어 있는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1890-1892)에서는 5명의 인물이 등장하며,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의 작품에는 4명으로, 그리고 다시 오르세 미술관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에서는 2명으로 줄었다.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된 이 작품이 그 중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으로, 구도에 대한 세잔느의 집착을 잘 보여준다.

황토색 계열로 차분하게 가라앉은 배경 속에 카드 놀이에 열중하고 있는 두 인물만이 부각되었다. 두 남자는 테이블 가운데 놓여 있는 술병을 중심으로 거울에 비추인 듯 거의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다. 화면 중앙으로 몰린 두 손과 카드들, 두 인물의 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는 팔, 두 개의 모자 등 엄격한 대칭 구도는 작품에 고전주의적인 기운을 불어넣었다. 화면 왼쪽의 인물이 좀 더 어둡게 칠해졌지만 두 장의 흰 색 카드와 파이프, 흰 셔츠 깃 등으로 명암까지도 완벽한 균형을 이루어낸다. 세잔느가 임의로 색을 칠한 것이 아니라, 화면의 구성과 균형을 위해 대상 하나하나를 심사숙고했음을 알 수 있다.



생 빅투와르산1 생뜨 빅뜨와르 산2

1904~06 캔버스 유채 73×92cm 필라델피아 미술관

가장 만년에 그린 생 빅투와르 산 연작 중 하나이다. 색감의 대조, 전경과 중경을 굽어보는 산, 불분명한 윤곽선에 의해 꿈틀거리는 대지의 공기. 이런 것들이 ‘생 빅투와르 산'을 통해 세잔을 위대하게 만들었던 요소들이다





<비베뮈에서 본 생 빅투와르산>1898년경 64.8×81.3cm 불티모어 미술관



1882년 이후 고향인 엑상프로방스 근처에서 머물렀던 세잔은 주위를 돌아다니며 자연을 관찰하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이 시기에 그를 가장 사로잡은 것은 생 빅투와르 산이었다.



대수욕1 수욕2, 1898∼1905년, 캔버스에 유채



만년의 7년간에 그린 이 작품은 이제까지 제작된 수많은 수욕도 중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출품 당시 젊은 화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전경, 중경, 원경 등 빈틈없는 논리적 화면구성은 세잔이 점차적으로 가슴 속에 쌓아왔던 고전적 정신의 결실이라 하겠다.







사과 바구니가 있는 정물 사과연구 녹색 사과

1890~94 캔버스 유채 65.5×81.3cm 시카고 미술관

인상파의 수업을 시작했을 때의 세잔은 색의 조화를 정확하게 표현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이 만족스러울 때까지 몇 번이고 캔버스에 물감을 덧칠 했고, 자연히 그림에 칠해진 물감은 두꺼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기술에 숙련된 40대의 세잔은 가는 필촉을 정리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고, 작품에 보이는 물감의 두께 또한 엷게 마무리 되었다.







목욕하는 남자들



수욕도 중 가장 고전적인 걸작.수직으로 치솟은 강 건너편의 나무들, 원근감이 분명한 형태의 크고 작은 인체들, 그리고 결정적을 화면 전체를 뒤덮고 있는 하늘의 흰 뭉게구름이 조화를 이루어 청량감을 더해 주고 있다. 갖가지 대립하는 요소가 이처럼 혼연일체가 되어 높은 통일감을 주는 예는 보기 드물다. 풍격 속에 많은 수의 인체를 등장시키고자 한 세잔의 초기 이래의 염원이 이 작품에서 비로소 가장 아름답고 완벽하게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빨간조끼의소년 정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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