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April 12, 2011

으젠느 앗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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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젠느 앗제 Eugene Atg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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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gene Atget, Organ Grinder, 1898

                          Eugene Atget, Organ Grinder, 1898


"당시에는 알려지지도 않았고 올바로 평가받지도 못했지만, 삶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조용히 작업하던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그의 생애 후반부터 강한 집중력과 성숙된 안목으로 사진을 만들어갔다. 그의 이름은 으젠느 앗제였으며 세상에 수많은 사진을 남겨 놓았다. 그는 사진의 본질적인 의미를 열정적이고 집요하게 찾으려고 애썼다."  - 베레니스 에봇, Berenice Abbott, 1951




스티글리츠와 더불어 현대사진의 원점으로 인식되는
카메라의 시인 으젠느 앗제
그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뱃사람의 잔심부름이며
떠돌이 극단의 배우로 안해본일 없는
밑바닥 인생으로 어두운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열살의 연상인 과부와 동거를 하기도 하는등 불우한 나날을 보내다
마흔살이 갓 넘었을때 파리에서의 사진인생을 보내기 시작한다



그의 사진은 예술작품으로써의 사진이 아닌
철저한 생계수단으로서의 사진이었다
그가 찍은 사진들은 화가들의 밑그림참고용이되어 팔려나갔다

그는 파리의 사라져가는 도시 모습과 시내의 건물들을 촬영했다




이러한 철저한 생계형 사진가 앗제가
빛을 보게된건 미국의 화가이며 사진가인 만 레이 덕분이었다.
앗제가 사망하기 일년 전인 1926년  그는 앗제의 사진 넉 점을
초현실주의자들의 기관지에 실어 주었고
그의 조수인 미류의 여류사진작가 에보트에게 그를 소개했다.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이 되었고 앗제가 남긴 2천여 장의 원판과 1만여장의 사진들을
찾아내어  1968년 뉴욕 현대 미술관이 영구 보존하게 되었다.



앗제의 사진은 시간적이라기보다는 공간적이다
유동하는 시간보다는 정지된 공간 속에서 정신적 안정감을 맛볼 수 있다.



오래된 길 , 오솔길 , 공원 혹은 정문과 창, 수레 , 건축물 장식 등
그의 사진적 대상들은 공통적으로 두 가지 의미심장한 문제를 제시하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출현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재이다.









 
으젠느 앗제(Eugène Atget, 1857‑1927)는 프랑스 사람입니다. 리부른 Libourne 에서 태어났구요, 일곱 살에 부모를 잃은 탓에 조부모들의 품에서 성장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1870년에 교육을 마친 앗제는 잠시 동안 대서양을 횡단하는 배의 선원으로 일했었습니다. 몇 번의 항해 뒤에는 배우가 되었습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류 레퍼토리 극단의 연기자가 된 것입니다. 이 일은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않았답니다. 이 후 그는 마침내 화가로써 파리에 정착했고, 1890년대에 사진가로 명성을 얻게 됩니다. 특히 19세기 파리에 대한 기록사진작업documentary photographs 으로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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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gène Atget, LampshadePeddler, 1920


화가로 정착하기 전까진 앗제는 시각 예술에 대해선 이렇다 할 훈련을 받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시각 예술에 대한 제한된 배경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진이 소득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예술가들 사이에서는 사진의 장면을 보고 그림을 그리는 것 관행 같은 것이 있었는데요, 앗제는 이를 이용해 사진으로 돈을 벌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사진을 몽파르나스의 근처에 사는 예술가들에게 팔았죠. 그는 자신의 사진을 ‘예술가들을 위한 문서documents for artists ’라고 홍보하기 까지 했다니, 의외로 비지니스 감각이 있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890년대 중반에 앗제는 첫 번째 카메라를 지른 이후 10,000 장이 넘게 파리의 풍경과 사람들을 찍었습니다. 1899년에는 몽파르나스로 집을 옮겼고, 1927년에 죽을 때 까지 그곳에서 살며 일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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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llows view cameras

 

앗제는 목조 주름통이 있고 수직 렌즈가 달린 대형 카메라를 사용해 파리를 찍었습니다. 파리의 이미지들은 18x24cm 크기의 유리 건판을 통해서 사진이 되었구요. 프레임 구석에 종종 생기는 비네팅vignetting은 사진기 위 격판덮개에 있는 렌즈를 옮기곤 하는 그의 습관 때문에 생겼다고 합니다(벨로즈 뷰 카메라 bellows view cameras 가 가진 특징 중 하나기도 하지요). 앗제는 이 방법을 통해서 이미지에 대한 통제와 정확한 원근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앗제 자신도 이 효과를 꽤나 선호했구요. 그는 자신과 친분이 있는 예술가들부터, 건축가, 출판업자에서 인테리어 디자이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에게 몽환적인 파리의 사진들을 공급했습니다. 그는 이런 활동을 통해 사회적 명성을 얻게 됩니다. 나중엔 파리 시청과 까르나발레 박물관 Carnavalet Museum 을 통해서 파리의 유명한 건축들과 랜드마크들을  보존하고 기록하기 위한 공식 사진사로 임명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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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gène Atget, coin de la Rue Valette et pantheon, 1925

 

디테일 이상의 공간과 환경을 생각하게 하는 넓은 전망 또한 앗제 사진의 중요한 포인트이지만, 무엇보다 앗제의 고풍스런 사진 기술이 보여주는 가장 큰 특징은 안개가 낀 듯한 부드러운 느낌입니다. 긴 노출을 통해 만들어지는 빛을 잡아 늘인 것 같은 효과가 이런 환상적인 이미지를 연출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는 현대 파리의 소란스러움을 피하기 위한 집중적이고 제한된 범위의 프레이밍을 구사했니다. 그의 작품에 나타난 거리 대부분은 비어있습니다. 이런 프레이밍은 이미지 전체에 구석진 감수성을 만들어냅니다. 이것이 부드러운 연초점과 맞물려서 사진에 초현실적인 느낌을 불어넣고 있는 것입니다. 앗제가 애착을 가지던 느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사진에서 '자연주의를 주장한 19세기의 영국 사진가들 중엔 초점을 약간 흐릿하게 만듦으로써 사물의 본질을 더욱 잘 드러낼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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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gène Atget, Le Quai, I'lle de la Cite, 1925

 

파리를 찍은 다른 비슷한 많은 기록 사진가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앗제 작업의 질적인 핵심은 깨끗하고 정적인 느낌일껍니다. 앗제사진의 정지된 느낌은 자연스럽습니다. 지나친 대칭과 완벽에 대한 능숙한 기피도 훌륭합니다. 앗제 사진에서 나타나는 아주 사소한 비대칭성은 사진이 완전함을 기할때 나타나는 비인간적인 느낌을 완화시켜줍니다. 이 사소한 불균형은 앗제가 삶과 세상에 어떤 방식으로 접근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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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gène Atget, Saint-Cloud, 1921-22



이런 이유들 때문에 앗제의 사진은 다다이스트 만 레이를 비롯해 앙드레 드랭, 앙리 마티스, 그리고 피카소 같은 1920년대의 유명한 화가들을 매료시켰습니다. 만 레이의 조수이자 동료 사진가이던 베레니스 에봇 Berenice Abbott 은 1927년 앗제의 죽음 이 후 그가 보게 된 사진들에 몹시 높은 예술적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아래 포트레이트는 앗제가 죽기 전 베레니스 에봇이 찍은 앗제의 마지막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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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gène Atget, Berenice Abbott, 1927 

“그는 도시의 역사가이며 카메라의 발자크,
앗제의 작업을 통해 우리는  프랑스 문명의 거대한 융단을 짤 수 있게 되었다.”

- Berenice Abbott

 
앗제에 대한 베레니스의 평가는 한 편으로는 정당히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아니기도 합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예술의 사명이라고 믿는 것이 발자크 식의 사실주의 realism 입니다. 이 원칙을 가장 충실히 반영했던 사람은 발자크 자신과 스탕달이었지요. 발자크 소설의 모든 주제는 하나로 귀결되었죠. 그것은 '돈'입니다. 있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사실주의의 제 1의 원칙을 잘 지킨 소설이 '돈'이라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앗제는 발자크처럼 왕당파도 아니었고 그 작품 역시 '돈'이라는 단 하나의 주제로 귀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앗제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면 역설적으로 현실을 포착하기 어렵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던것 같습니다. 현실주의의 한계를 넘기 위해 예술가들은 수천년전부터 '상징'을 이용해왔지요. 발자크의 모더니즘으로서의 리얼리즘 너머엔 카프카의 소설, 그 무서운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들로 충만한 그의 소설이 위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실은 복잡하고, 현실의 복잡성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어렵게 만듭니다. 이럴 때 예술은 알레고리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런 알레고리를 사용한 카프카의 작품이야 말로 리얼real 에 접근하게 되지요. 앗제의 사진은 알레고리와 리얼리즘 사이에 걸쳐있습니다. 실제로 그가 찍은 파리의 사진은 사실적인 파리의 모습이라기 보다 파리의 상징에 가깝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즉 앗제는 발자크적이면서 동시에 카프카적인 면모를 가졌던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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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gène Atget, ragpicker,1900
앗제가 죽었을 때, 에봇의 파트너인 미국인 줄리앙 레비 Julien Levy 가 1,500 점의 네거티브와 8,000 장의 인화물을 구입합니다. 이를 기점으로 앗제 작품의 가격이 본격적으로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예술작품은 예술가의 죽음 이후에 가격이 오른다는 속설이 있는데, 앗제도 예외는 아니었나 봅니다. 현재 이 사진들은 MoMA(뉴욕 미드타운의 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답니다. 그녀는 가격 뿐만 아니라 앗제 사진에 대한 예술적 평가도 끌어올렸습니다. 기록 사진에서 예술 사진으로 말입니다.

기록사진인 동시에 예술사진을 찍는 것은 모든 균형잡힌 사진가들의 꿈입니다. 앗제는 그 꿈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앗제는 사진이 예술인 동시에 기록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 거장입니다. 그것이 디지털 시대에도 앗제의 19세기 사진들이 사랑받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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