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July 25, 2012

관계성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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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렌 하비 <실패의 미술관:불가능한 물체와 보이지 않는 자화상 컬렉션> 혼합재료 243.9×304.8cm 2007(Courtesy 뉴욕 룩스갤러리)

2008휘트니비엔날레와 관계성의 미학

글 | 박영미·작가, art in ASIA 뉴욕 통신원

‘관계성의 미학’은 1990년대 초 유럽에서 시작된 이래, 지난 10년간 끊임없는 관심과 논쟁의 대상이 되면서 지속적으로 발전해 왔다. 그러나 휘트니비엔날레로서는 이번이 최초의 시도인 만큼, ‘관계성의 미학’의 근본 개념에 대한 탐구도 미흡하고 전시 조직자들의 미학적 철학적 관점도 분명하게 제시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관계성의 미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미국 현대미술의 주요 흐름 중 하나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2008휘트니비엔날레는 미국 현대미술사에 중요한 의미를 남길 것으로 예상된다.
뉴욕시는 고도로 발달된 기계 문명과, 이로 인한 사회의 기계화에 저항하는 예술 작업이 공존하는 지역이다. 따라서 이에 따른 긴장감을 해소시키기 위해 ‘관계성의 미학’과 같은 개념이 절실히 요구되는 곳이기도 하다. 즉 이번 휘트니비엔날레가 시도한 방향, 마음을 통한 만남과 상호협력 활동 자체를 미술 작품으로 제시한 것은 예술가와 대중 모두에게 필요한 것으로, 참여도도 갈수록 늘어나고 그 예술적 표현도 정련될 것으로 기대된다.



코리 맥코클 <아직 제목이 정해지지 않은 스틸사진> 비디오 2008(Courtesy 뉴욕 마카론 Inc)

오브제를 넘어서는 관계의 미술

이번 비엔날레의 큐레이터는 휘트니미술관 큐레이터 헨리엣 훌디쉬(Henriette Huldisch)와 동 미술관 협력큐레이터이자 앨트리아 휘트니미술관 분점의 디렉터 및 큐레이터를 역임한 샤밈 모민(Sha mim M. Momin)이다. 참여 작가는 총 81명으로, 그 중 43명은 뉴욕, 29명은 로스앤젤레스와 베이 에리어, 3명은 마이애미에서 선정되었다. 지난 휘트니비엔날레가 휘트니미술관을 주된 전시장으로 삼아 진행되었다면, 이번에는 미술관 건물 이외에 파크애비뉴 아모리빌딩에서도 반 달 넘게 설치작업이 전시되고 퍼포먼스가 열렸다.
두 명의 큐레이터가 전시의 사회 교류적 요소를 중시함에 따라, 아모리 전시에는 순간적이고 참여를 유도하는 설치작품과 이벤트가 주로 유치되었다. 물론 이에 참여한 대부분의 작가들은 휘트니미술관에도 작품을 설치하거나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그리고 회화 작품이 포함되기는 했지만, 전시작 대부분은 비디오나 조각, 그리고 작가들 각각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프로젝트를 시작하여 전시장에서 마무리 짓는 형식을 취했다.
큐레이터 모민은 “이번 비엔날레는 90년대 말에 유행하던 미술 용어인 ‘관계성의 미학’의 최신판”이라고 언급하면서 작가들을 선정함에 있어 이 유럽의 미술 개념이 중요하게 작용했음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이번 비엔날레에서 이 개념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간과된 듯 하다. 1997년 출판된 니콜라 브리오의 《관계성의 미학》은 1990년대에 미술을 대중에게로 환원시키고자 시도했던 여러 작가들의 작품 경향을 명료하게 이론화시킨 책이다. 이 경향의 작가들에게 있어 미술작품의 역할은 상상이나 유토피아 세계를 형상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미술작품이란 현실에 맞는 삶의 방식과 이에 걸 맞는 모범이 될 만한 행위를 보여주는 것으로, 사람들이 모여들 수 있는 바(Bar)나 독서용 라운지도 미술작품으로 전시될 수 있었다. 작가들에게 이 설치작품들은 단순한 오브제라기보다는 소통과 교류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관람객 그리고 더 나아가 폭 넓은 지역 공동체와 보다 밀착된 관계를 맺어갈 수 있게 하는 매개체로 여겨졌다. 이처럼 동일한 의식 구조를 가진 작가들 간의 사회 조직망을 매개로 한 예술 행위와 협력 등이 ‘관계성의 미학’ 개념의 중심을 이룬다.
이와 유사하게 다수의 2008휘트니비엔날레 선정 작가들은 이미 서로 알고 지내며 관계를 유지하던 사이로, 자신들의 작업실이 아닌 외부에서 공동 작업을 자주 벌여 왔다. 또한 관중들은 24시간 지속되는 댄스 마라톤이나 파자마 파티, 동물 댄스교실 등에 동참하고, 참여 작가인 에두아르도 사라비아(Edu ardo Sarabia)가 설치한 바에서 무료로 제공되는 술을 마시면서 작가들과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거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이는 작가들의 공동 작업의 일환으로 파악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미술 방식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퍼포먼스나 상황주의 미술, 플럭서스 그리고 1970년대 해프닝 미술이 연관되어 있다. ‘관계성의 미학’의 새로운 점이라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Globalization) 과정에서 생기는 문제점이나 그와 관련된 상황들에 대한 해결점을 찾아가고자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화된 비즈니스 체계는 재화 획득에만 몰두하고 이에 따른 변화를 위한 또 다른 ‘변화’만을 모색함으로써 우리의 문화 생산 욕구나 그에 대한 향수를 마비시켜 왔다. 이 개념을 추구하는 작가들은 이와 같은 세계화 및 소비 자본주의의 문제점에 대항하고 이를 시정하기 위한 예술 활동을 추구한 것이다. 이들은 사회의 기계화로 인해 우리가 인간적 교류와 이웃 사랑의 정신을 잃어버렸다고 믿는다. 따라서 그들이 추구하는 이 개념을 통해 지엽적 구체성을 강조하며 주변과 대화하고 누군가와 악수를 나누는 작은 유토피아를 창조하고자 한다.
이러한 지엽적 교류와 관련하여 전시 큐레이터 훌디쉬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아가디 스노우(Aga the Snow)가 주최하는 시식 모임이나, 베를린에 위치한 유나이티드네이션플라자(United nation plaza)라는 협력 공간의 지하실처럼, 작가들을 연결해 주는 지적 사교 모임이 곳곳에 존재한다고 한다. 큐레이터들은 이제 그러한 동일한 의식을 가진 구성원들을 방문하고 그들과 함께 경험한 후, 그 모임 자체를 전시 행사로 재구성했다. 모민은 “미술이 단지 미술품이 아니라 인간관계일 때, 이를 경험해 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것을 이해하겠는가? 그 이웃성(Locality)을 수용하는 것이 우리 임무의 일부이다”라고 말하면서 ‘관계성의 미학’을 대하는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관계성의 미학’을 추구하는 작가들은 미술품을 만들지 않고 관중들의 교류와 이와 연관된 아이디어나 이벤트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그 예술적 기준은 과정 자체에 있다. 따라서 이들의 전시는 인간 관계 자체나 사회적 교류를 촉진시키는 과정을 강조하면서, 그러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거창한 오브제는 기피하고 손수 조립된 가구와 같이 검소한 물건들을 진열한다. 관객들은 더 이상 관람자가 아니다. 즉 그들은 작가들이 사람 사이의 관계란 조율될 수 있고 자연 발생적이며 융통성 있게 열려 있다는 생각을 실현시키고자 주최한 행사의 ‘참여자’이자, 변화를 경험하는 ‘동참자’이다.
따라서 2008휘트니비엔날레의 두 큐레이터는 좀 더 새로운 버전의 ‘관계성의 미학’을 제시하기 위하여 순간성과 과정 자체를 중시하는 작품 중심으로 전시를 구성했다. 또한 지엽성을 중요시하고 작품 선정에 있어 검소함과 순간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미카 로텐버그(Mika Rotten berg)의 허름한 외양간 같은 구조물이나, 재활용품과 같은 허름한 재료로 만들어진 제데디아 시저(Jedediah Caesar)의 조각, 새가 떨어뜨린 오물의 형상에 착안해서 제작된 찰스 롱(Charles Long)의 조각 및 발판과 의자, CD 그리고 쓰고 남은 것들을 여기 저기 흐트러 늘어 놓는 미술로 유명한 제이슨 로즈(Jason Rhoades)의 설치 작품, 산업 재료와 천연 재료를 성공적으로 배합시켜 관심을 모은 피비 워쉬번(Phoebe Washburn)의 생태계 설치작품, 검은 비닐들로 만든 로드니 맥밀런(Rodney McMillian)의 조각은 전시 의도를 인상적으로 잘 표현해 준 작품들이었다.



아가디 스노우 <하나> 벽돌, 나무, 콘크리트 외 혼합재료 398.8×259.1×152.4cm 2007

미래 세계의 제시, 진정한 ‘관계성의 미학’이란

두 큐레이터가 밝힌 바에 따르면, 선정 작가들이 이미 서로 연결되어 활동하게 된 경위는, 대부분 30대에 속하는 몇몇 작가들이 약 2년 전 뉴욕의 로우 이스트사이드 지역에서 시작한 활동에서 비롯되었다. 9.11 테러와 제2차 걸프전쟁, 이라크전쟁, 그리고 1970년대와 1980년대 미술에 나타난 정치적 노력의 미미한 영향력 등에 실망한 이들 작가들은 혁명을 외치는 제스처나 그 정치적 움직임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냉소적으로 변모할 수밖에 없었다. 기존의 체계들은 실패했고 진보란 속임수라고 믿으면서, 이들은 보다 지엽적인 일들에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따라서 자신들의 아파트나 지하실로 다른 작가들을 초대해서 세미나를 열고 토론하며, 작은 규모의 전시용으로 조롱 섞인 전시 공고를 쓰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들 작가들은 이러한 소규모 그룹 활동들에서 재미를 느끼면서, 동시에 이것이 사회를 재창조하는 실험과 같은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친구들과 함께 밴드를 연주하고 글을 발표하거나 함께 정원도 가꾸면서 “될 대로 되라”라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고 한다. 비엔날레 도록의 서문에서 모민과 훌디쉬는 이들 작가들이 심지어 ‘실패’라는 개념도 포용하며 이는 일부 작가 작품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자신들이 지엽적인 일로 관심을 돌리게 된 점에 대한 설명이 다소 평범하고 피상적으로 들리는 만큼, 유럽 ‘관계성의 미학’의 진정한 근본 의도와 휘트니비엔날레에 선정된 작가들이 제시하는 ‘관계성의 미학’이 어떤 차이를 보이는 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 이론화시킨 브리오는, 이 개념의 의도는 미래의 세계를 제시하고 공표하는 데 있다고 믿는다. 브리오에게 이는 가능하다고 파악되는 세계들을 사회에 모범적으로 제시하면서, 생산을 통해 이를 널리 알리는 일종의 위성 중계지와 같은 장소로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모범적인 역할이란 많은 책임이 수반되는 일이고 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현실에 단단히 발을 붙이고 비판적 분석적 그리고 미적인 종합 능력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즉 많은 사람들이 잃어버린 진정한 사회 교류의 가치를 참신한 시각으로 제시하고, 그동안 잊고 지냈던 대화와 열린 마음의 고귀한 가치를 회복시켜주기 위해 적극적인 자세로 임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작가 아드리안 파이퍼(Adrian Piper)는 백인 참여자들에게 흑인의 펑크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펑크 레슨’이라는 일련의 참여 이벤트를 기획한 바 있다. 이 이벤트를 끝낸 후 파이퍼는 “매우 조직적이고 통제된 문화적 조건 안에서 문화적 인종적 장벽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우리 모두 자아 초극과 창조적 표현이라는 희열에 찬 과정에 몰두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독자에 따라서는 이러한 미술행위가 설명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지만, 이번 휘트니비엔날레의 작가들의 소극적 활동보다는 이와 같은 그룹의 공동 노력이 우리가 원하는 모범적인 미래의 세계에 보다 가깝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러한 협력이야말로 바로 우리가 다가올 2010휘트니비엔날레에 바라는 방향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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