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July 31, 2012

삶의 흔적과 궤적을 지우는 작가_사이 톰블리(Cy Twombly)

그림 : http://percipere.egloos.com/2315844

http://www.paradisegroup.co.kr/kor/cyber/magazine/?m=view&IdxNo=46&PBSC=pb015
원본 : 

2001년 제49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작가 부문 황금사자상을 수상해 더욱 빛을 발했던 사이 톰블리는 1928년 미국 버지니아 주 렉싱턴에서 태어났다. 보스턴 미술관 학교와 워싱턴 대학교, 리 대학교, 뉴욕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여기서 그는 로버트 라우셴버그의 권유에 따라 노스캐롤라이나 주 애슈빌의 블랙 마운틴 칼리지에 입학해, 프란츠 클라인, 로버트 머더웰의 지도를 받았다. 이 당시는 그의 작품에 프란츠 클라인의 표현주의적 성향이 나타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의 주요 전시로는 레오 카스텔리 미술관, 밀워키 아트센터와 스위스 베른 미술관, 휘트니 미술관, 뉴욕 현대미술관 등의 유명 미술관에서의 대규모 회고전을 연 바 있으며 1995년 휴스턴에 사이 톰블리 갤러리가 문을 열기도 했다. 1952년 버지니아 미술관이 주는 상을 받으면서 북아프리카, 이탈리아와 프랑스 등을 여행할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톰블리는 재스퍼 존스, 로버트 라우셴버그, 바넷 뉴먼, 마크 로스코 등과 같이 추상표현주의 제2세대에 속한 작가이다. 그러나 동료 작가들의 화려한 활동 속에 철저하게 소외되었던 톰블리는 1957년 전후 미국 아방가르드 무대인 뉴욕을 떠났다. 1955~1959년 사이에 뉴욕과 로마를 오가며 작업을 하던 톰블리는 결국 로마로 작업실을 옮기기로 결정했다. 로마에서 그는 처음으로 하얀색을 입힌 추상조각을 시작했으며, 이 시기가 바로 현재의 톰블리를 있게 한 전환의 길목에 해당된다.
이러한 이탈은 당대의 시각으론 이해가 어려운 결정이었으나 어쩌면 그러한 결단이 지금의 톰블리를 있게 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톰블리는 미니멀리즘과 팝아트의 세계로 옮겨가던 미국 미술계의 흐름과 절연된 채 외롭게 자기만의 세계에 몰두했다. 이러한 그의 선택은 그 당시 작가에게는 상당한 부담감과 데미지를 줄 수 있는 큰 모험이기도 했다. 이것은 미국 화단에서 사이 톰블리라는 작가의 이름이 동시대 작가들에 비해 아주 뒤늦은 시기에 조명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해볼 때 직접적인 이유로 작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탈리아로 가기 전 그의 초기 작업은 빌렘드 쿠닝의 흑백 회화의 영향을 받은 서정적인 추상주의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시대계승적인 작업에 점차 환멸을 느낀 톰블리는 자신의 언어를 추구하고자 하는 열망에 휩싸이게 되면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모험을 시작할 계기를 찾게 된다. 그는 경제적인 안정을 뒤로 한 채 이탈리아로 떠났고, 그곳에서 역사 속에 새로운 돛을 달고 항해를 시작하면서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게 된것이다. 미국 출생인 톰블리는 추상표현주의가 절정에 달해 전위성을 상실한 현실을 탈출하여 유럽 문화를 접하면서 짧은 역사를 지닌 미국과 대조되는 역사적인 고전신화와 문화 예술을 흡수하여 작품으로 소화해냈다. 서사적이고 고전적인 주제를 다루면서도 그의 그림은 구체적인 이미지 없이 마치 수수께끼처럼 식별하기 힘든 기호들과 글자, 선묘가 나열되어 있으며, 붓을 사용한 전통적인 채색방법 대신 유백색 또는 검은 캔버스에 물감을 묻힌 손가락과 손바닥을 사용하거나 연필과 크레용을 이용하여 즉흥적인 손의 움직임을 전달하는 드로잉 방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었다.

수수께끼처럼 식별하기 힘든 기호들과 글자, 선묘

톰블리의 작품을 형성하는 기본 요소는 바로 ‘선’이다. 그는 크레용, 연필, 잉크 등의 필기도구를 사용해 종이 위에 도형, 숫자, 기호 등의 요소를 채워넣기도 하고 지우기도 하면서 작품을 완성해나갔다. 그래서 거리의 낙서에서 예술적인 에너지를 발견하고 그것을 작업에 도입한 작가라는 평을 받고 있기도 하다.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희미하게 미끄러지는 듯한 글자체, 긁힌 자국이 어우러진 캔버스, 그는 이 캔버스에 인간의 삶에서 나타나는 사실, 우연, 목적, 놀라움 등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작업은 드로잉 개념과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작업 특징은 평면에 펴져있는 서투른 글자체들, 중간중간에 보니는 숫자의 개입,그리고 끄적거린 드로잉들에서 기인한다고 했다. 캔버스 위의 이런한 다양한 주체들이 존재하여 사건을 만들어내고 있으며,그래서 그의 작품은 연극이 행해지는 무대라고도 표현하기도 했다.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자동기술법’(automatism)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여 선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려했다. 그들은 드로잉의 가장 개인적이고 자기 고백적이라는 개념을 극대화시켰는데 그렇게 의식의 통제를 배제해 흘려 쓴 선들은 묘사적인 성격에서 벗어나 거의 자율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미국에서 1940년대와 1950년대에 활약했던 추상표현주의자들의 캔버스는 신체의 제스처를 통해 내면의 정신세계를 자발적인 선으로 분출되어 표현하는 일종의 회화적 글쓰기의 장소였다. 이제 그들의 작품에서는 전통적인 서구 회화에서의 회화와 드로잉의 구분이 없어져버렸고, 드로잉 그 자체가 주제가 되었다. 톰블리의 낙서와 같은 드로잉도 신체와 긴밀한 관계를 갖는다. 그의 선은 긴장되고 가는 철사와 같이 전기가 통하는 듯한 매우 감각적인 느낌을 준다.
톰블리는 장 미셸 바스키아나 키스 해링보다 먼저 그래피티(Grafitti,낙서화라는 의미의 이 용어는 지하철이나 건물 외벽에 스프레이를 뿌려서 만드는 공격적인 그림을 지칭하는 요즘의 의미가 아니라 스크래치와 같이 더 부드러운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의 가능성을 파악해 후대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여기서 톰블리는 글자가 회화로 전환되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그 자체로 ‘시적 언어를 지니고 있는 깊이 있는 회화’라고 정의되기도 한다.
톰블리의 드로잉에 대한 관심은 움직임과 속도를 시각화하고자 했던 20세기 초반의 이탈리아 미래주의의 영향과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 그리고 아이디어 스케치로 가득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노트를 접하게 되면서 고조되었다. 1950~1960년대의 지배적인 양식상의 흐름과 관계없이 독창적으로 형성된 그의 드로잉 작업은 오늘날 때로는 낙서화로, 또 한편으로는 추상표현주의의 마지막 계승 등으로 다각적인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1960년대 작업에서 보여지는 격정적인 스크래치는 작가 자신이 말했듯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보인다. 또한 고대 지중해 문명의 신화와 문학에 깊이 빠져든 고전주의자라는 평을 받기도 한 그의 작품은 포스트모더니즘에 이슈거리가 되고 있기도 하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전통을 다루는 방식을 날렵한 일별, 무차별적인 인용, 부분의 결합 등으로 본다면, 이러한 특징은 톰블리의 작품 전반에서 찾아볼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생성되기도 전에 도래할 시기의 사조적 특징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시대를 뛰어넘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시적 언어를 지닌 깊이 있는 회화

톰블리의 작업에 대해 롤랑 바르트는 “그의 캔버스 안에는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으며, 그 사건들은 사실, 우연, 궁극적 목적, 놀라움, 행위라는 유형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이 작가의 회화에서 느껴지는 인상은 추억과 감각이 용해되어 있는 지중해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평하면서 우연하면서도 호기심을 유발하는 그의 작업 특징은 평면에 퍼져 있는 서투른 글자체들, 중간중간에 보이는 숫자의 개입, 그리고 끄적거린 드로잉들에서 기인한다고 했다. 캔버스 위의 이러한 다양한 주체들이 존재하여 사건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그래서 그의 작품은 연극이 행해지는 무대라고도 표현하기도 했다. 또한 그가 남기고 있는 언어들­로마, 고대의 시 등­로부터 어떤 이미지를 환기해내는 문화적이고 지적인 주체, 그리고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환희에 젖어 있는 즐거움의 주체, 그림에 부재하는 것을 떠올리려는 기억의 주체, 또한 톰블리처럼 그리고 싶다는 욕망을 품게 하는 생산의 주체가 그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다양한 감상자의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삶의 흔적과 궤적을 스스로 지우면서 동시에 추억해낼 수 있는 실마리를 끊임없이 제공하고 유도해냄으로써 캔버스를 하나의 무대로 연출을 해내는 작가 사이 톰블리. 그가 많은 예술가 중에서도 지적인 영감을 소유한 작가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우리 시대의 위대한 작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한 결과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김성희|미술평론가

참고문헌
Kirk Varnedoe, ‘Cy Twombly:A Retropective’, Harry N Adams, 1998
Cy Twombly, Richard Howard, Kirk Varnedoe, ‘Cy Twombly: Lepanto’, Gagosian Gallery, 2002
Charles Darwent, ‘Remember you’re a Twombly’, The Independent on Sunday, 18 August 2002,
Roland Barthes , ‘The Wisdom of Art’, Cy Twombly: Paintings and Drawings, 1979,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김영나, ‘서양미술의 드로잉’, 서울여자대학교 조형연구소,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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