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November 1, 2013

바우하우스 교수 - 모홀리나기(Laszlo Moholy-nagy) : 빛 그 자체를 주제로 한 작가

 나즐로 모홀리-나기 (Laszlo Moholy-nagy,   헝가리,   1895∼1946)
  • 1913년    부데페스트 대학에서 법률공부
  • 1915년    제1차세계대전중 포탄의 충격으로 병요양 중에 회화를 시작
  • 1922년    포토그램(Photogram)의 실험을 시작, 바우하우스(Bauhaus)의 교사로 초빙
  • 1925년   《회화·사진·영화(Painting, Photography, Film)》간행
  • 1928년    바우하우스 사임
  • 1937년    시카고의 미술공업협회에 초빙되어 협회가 설립한 뉴 바우하우스(New Bauhaus)
  •                의 교장으로 취임
  • 1938년    재정난으로 신 바우하우스는 폐교
  • 1944년    디자인 연구소(Institute of Design) 개설
  • 1946년 11월 24일    미국 시카고에서 백혈병으로 사망

나즐로 모홀리 나기(Laszlo Moholy-nagy)는 제1차세계대전중에 화가로서 활동을 시작하여 제2차세계대전의 종식 직후에 병으로 사망하여 세계사의 격동시대를 살아간 예술가로서  그는 결코 자기 자신을 사진가라고 생각한 적이 없고 단지 몇 장의 사진이 그의 인생에 관련되었다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모홀리-나기의 활동무대는 모국인 헝가리에서 시작하여 독일, 네델란드, 영국, 미국 등으로 옮기며 각각의 나라에서 주목할 만한 업적을 올린 국제적 예술가였다. 또한 활동분야에 있어서도 기본은 회화였지만 살아있는 동안 실험정신이 넘쳐 사진, 영화의 영상예술 레이아웃, 타이포 그래픽 등의 각종 상업미술, 무대예술이나 무대장치, 금속이나 프렉시유리를 이용한 입체조형과 조형예술 혹은 시각예술의 전체영역에 걸쳤으며 더구나 각각의 분야에서 참신하게 창의가 넘친 작업을 전개하였다. 또한 모홀리-나기는 창작활동과 겸하여 1919년 독일에서 시작된 바우하우스(Bauhaus)에서 교수로시작하여 미국의 뉴바우하우스(New Bauhaus) 창립자로서 조형교육활동에서 또한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모홀리-나기의 창작활동은 크게 3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우선 첫번째가 렌즈를 통한 육안의 시각적인 표현으로 일상적 시각에서 벗어나 주로 앵글의 변화에 따라(하이앵글High-angle, 로우앵글Low-angle) 또는 클로즈업(Close-up)을 통하여 다각적인 방향에서 바라보았다. 두번째는 렌즈를 사용하지 않고 인화지 위에 직접 물건을 올려놓고 감광시켜 오브제의 윤곽뿐만 아니라 질감까지도 기록하는포토그램((Photograms)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눈으로 무엇을 본다는 것은 그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대상이 반사하고 있는 빛을 보는 것이라는 현대과학의 시각적 입장에서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오브제들은 빛의 전달도구 역할을 한 것이기 때문에 오브제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고 다만 빛과 감광면의 화학적 반응에 의해서 나타난 추상적 표현이 주된 관건이었다. 세번째는 콜라쥬와 포토몽타쥬(Photomontage)로 작품을 제작하였는데 콜라쥬는 프랑스어 동사로 꼴레(coller)라 하며 이 뜻은 '접착한다'이며, 포토몽타즈란 프랑스어로 '조립'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그 뜻에서 느낄 수 있듯이 이는 한 장의 화면에 여러 장의 사진을 합성해서 만든 것을 말한다. 특히 모홀리-나기가 추구한 몽타즈 기법은 포토 플라스틱(Photo Plastic)으로 분류될 수 있는데 이는 몽타즈 중에서도 시각적인 투시법을 정돈한 몽타즈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와같은 포토 플라스틱을 사용한 대표작이 아래에 나와있는 <질투(Jealousy)>라는 작품으로 1928년에 만들어졌다.
nagy-Jealousy.jpg (15666 bytes)

"질투(Jealousy)" (1927), by Laszlo Moholy-nagy

모홀리-나기는 자신의 창작활동과 동시에 조형교육활동에도 힘을 가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19년에 독일 바이마르시에 건축가인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에 의해 세워진 바우하우스(Bauhaus)에서 1922년∼1928년까지 예비반과 금속아틀리에 담당 교수로 활동하였다. 바우하우스의 'Bau'는 독일어로 건축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이름이 시사하듯 건축을 중심으로 모든 예술분야의 총제적 조화를 꿈꾸었던 조형예술가들의 실험장이자 교육기관으로서의 조형예술학교였다. 이 학교에의 목표중 하나인 실용성을 기초로 한 예술과 테크놀로지의 새로운 통합이 있는데, 모홀리-나기는 이에 알맞는 현대의 과학적인 시대의식과 일치하는 새로운 차원의 시각을 모색하였다. 사실 모홀리-나기가 유명해진 것도 사진작품에 의해서였지만 그가 바우하우스에서 사진을 실제로 지도한 적은 없었다. 사진은 1929년에 모홀리-나기가 퇴임한 다음에 발터 페테르한스의 한과목으로 채택되었고 다만 모홀리-나기는 끊임없는 탐구적 정신과 시각의 확대로서 사진에 대한 철저한 현대적 신념을 세웠다고 말할 수 있다.
모홀리-나기가 바우하우스로 영입되면서 바우하우스는 새로운 전환점을 예시하였다. 사람들보다는 기계들 사이에서 더 편암함을 느꼈던 모홀리-나기는 기존의 바우하우스 교수들과는 전혀 다른 교수법을 기용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기법, 재료들을 합리적이고 실용성있게 쓸 것을 강조했고 이젤 그림이나 조각품 대신 새로운 테크닉과 매체로 눈을 돌려 시각과 마음을 개방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기계 앞에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도 사용할 수 있으며, 테크놀로지에는 전통도 없고 계급의식도 없다라는 주장을 펼쳤다. 또한 그의 사진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은 시각적인 인식인만큼, 무엇을 표현하는가.. 어떻게 표현하는가.. 보다는 어떻게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매달려 사진적 시각에 집중되어 <벌레의 눈으로 본 외계>, <새의 눈으로 본 전망>, <음화>, <다중노출>, 등을 연구하였다.
결국 모홀리-나기는 자신의 조형이론을 세운 예술교육자로서 체계적인 연구를 통해 '새로운시각(New Vision)'을 창조하는 일환으로 포토그램을 제작하였고, 사진과 타이포그래피 등 새로운 시각매체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고 이를 교육에 적용시켜갔다. 1925년 간행된 그의 저서 《회화 · 사진 · 영화 (Painting, Photography, Film)》는 사진에 관한 이론적 고전으로 유명하다. 이후 바우하우스가 나찌에 의해 강제 해산되면서 바우하우스의 정신을 모홀리-나기가 이어 미국 시카고로 이주하여 이곳에서 뉴 바우하우스(New Bauhaus)를 열어 미국의 디자인과 사진의 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 뉴 바우하우스는 겨우만 1937∼38까지 계속되었지만 곧 1939년에 재등장하고, 1944년에는 Institute of Design이라고 개명하며, 1949년 모홀리-나기가 사망한 뒤 Illionis Institute of Technology에 합병되었다. 그의 저서로는 《새로운 시각》(1946년), 《운동에서의 시각》(1947년)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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